日帝가 펴낸 한국 첫 동화집 번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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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우리나라 최초의 동화집은 1924년 일본어로 출간된 '조선 동화집'이다.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한반도 전역의 민담.설화를 채록해 펴낸 이 책에는 잘 알려진 전래 동화 25편이 수록돼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었지만 1990년대 들어서야 그 목차가 알려지기 시작한 이 책이 최근 한국어로 번역돼, 같은 제목인 '조선 동화집'(집문당)으로 출간됐다.

이 책에는 '혹 떼이기 혹 받기''심부름꾼 거북이''종을 친 까치''은혜를 모르는 호랑이''금방망이 은방망이''놀부와 흥부''선녀의 날개옷'등 1920년대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초등학교 교과서는 물론 각종 아동 출판물에 수록돼 온 대표적 전래 동화가 실려 있다.

가로 12.7㎝, 세로 19㎝의 원본 '조선 동화집'(사진(左))에는 편저자나 저자로 볼 만한 개인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고 단지 '조선 총독부'라고만 쓰여 있다. 제목 위에는 '조선 민속자료 제 2편'이라는 총서 표시가 있다.

이 책을 번역하고 해제를 달아 새로 펴낸 권혁래(38)건국대 동화와 번역 연구소 교수는 "전래 동화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며 조선의 이미지를 형성해 왔고 또 각종 전래 동화집의 원전이 되는 선구적 역할을 했지만, 조선총독부에서 펴냈다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그 역사적 공과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면서 "조선의 민속문화를 식민지 동화 정책의 일환으로 연구했던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정치적 의도를 밝혀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록 작품 중 '교활한 토끼'와 '어머니를 버린 남자'등은 조선총독부의 정치적 의도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교활한 토끼'에서 주인공 토끼는 잔인한 악한으로 묘사돼 있다. 토끼로 대변되는 조선 전통의 해학과 유머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일본인 편집자의 다른 의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 고려장(高麗葬) 관련 설화를 담은 '어머니를 버린 남자'에서 주인공 남자는 본디부터 마음이 악하고 게으른 인물로 그려진다. 권교수는 "남자가 게으르고 악독해 부모를 버렸다는 설정은 '조선 동화집'을 비롯해 일본인들이 간행한 전래 동화집에서만 나타난다"면서 "고려장 설화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잘 몰랐거나 아니면 편집자의 의도에 따라 각색된 것"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권교수는 "조선 민담에 나오는 '발랄하고 꾀 많은 토끼'와 '효성스러운 자식'의 모습은 지극히 조선적인 캐릭터"라면서 "전통적 캐릭터를 부정적 형상으로 변형하는 것은 1920년대 들어 문화정책을 펴고 있던 조선총독부의 담당자로서는 흥미를 느낄 만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민담을 동화라는 근대문학 장르로 옮기는 과정에서 고도의 정치적.문화적 계산을 했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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