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 칼럼] 내가 정치인이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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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선거가 다시 가까워온 모양이다. 여야가 술렁이고 있다. 한쪽은 머리채를 잡고 "네가 나가라, 나는 못 나간다"고 싸움을 벌이고, 다른 쪽은 너희 때문에 우리도 떨어지게 생겼으니 "60세 이상은 나가라. 5, 6공은 떠나라"고 외치고 있다.

불과 6개월 전에는 형님아우니, 동지니 하며 같이 붙어 다니다가 이렇게 원수가 되니 정치하는 사람들의 속내를 알 수 없다. 이런 싸움이 바로 정치라고 한다면 보통사람들은 얼굴이 뜨거워져서라도 그 판에 낄 수 없다. 정치인의 얼굴이 두껍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까.

*** 형님아우가 원수 사이로 돌변

내가 만일 민주당의 구주류, 소위 DJ부대라면 나는 두말 않고 정치를 그만두겠다. 생각해 보라. 지난 5년간 정권을 잡아 이 나라를 위해 한 일이 무엇인가.

경제는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고, 역사적인 위업이라던 남북 정상회담은 결국 돈을 주고 얻어낸 것이고, 그 여파로 남쪽은 갈가리 찢어졌다. DJ의 2인자라는 사람들은 몇백억원씩 먹고 감옥에 가있다. 양심이 있다면 "같은 정치세력 일원으로서 책임을 느끼고 이제 정치를 그만두렵니다"라고 물러나는 것이 온당한 일 아닐까.

내가 만일 한나라당의 5, 6공 출신이라면 나는 미련없이 정치에서 물러나겠다.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지난 대선에서 왜 그와 같은 결과가 나왔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5, 6공에 참여하여 정치를 한 것까지는 당시의 현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군사정권 시절이 끝났을 때 정치는 그만두었어야 했다. 그것이 분별력 있는 사람의 처신이다. 짧게는 십몇년, 길게는 20년 넘게 지금까지 끈질기게도 붙어 있다.

그러니까 젊은이들이 한나라당 하면 5, 6공을 생각하고, 그것이 이번 대선 패배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이 나라 보수주의가 지금 이처럼 공격받고 있는 이유도 5, 6공 인사들이 마치 보수의 본류처럼 비춰진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내가 만일 민주당 구주류라면 나는 억장이 무너질 것이다. 아니 대통령은 누가 만들어 주었는데 지금 와서 우리보고 나가달라고? 개혁이네 무어네 떠드는데 너희 초.재선 의원들, 누가 지금의 너희들을 만들어 주었는데?

우리는 정치자금 만들어 너희들 당선시킨 대가로 감옥 가고, 너희들은 깨끗한 개혁세력이라고 큰소리 치고…. 국회의원 시켜달라고 손비빌 때 생각을 해봐라. 하늘이 무섭지 않은가. 나는 이렇게 원망할 것이다.

내가 한나라당 5, 6공 인사라면 나는 기가 막힐 것이다. 아니 젊은 것들이 내가 나이가 많으니 물러나 달라고? 대선에만 이겼어도 한 자리 잘 차지하고 있을 나를 감히….

국회의원 공천 받으려 연줄 놔달라고 나를 찾아 다닐 때는 언제고 지금은 표가 안나오게 생겼으니 떠나달라고? 청와대가 세대교체니, 코드니 하고 떠드니 우리당 젊은 것들도 덩달아 뛰는 꼴이란…. 이렇게 개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역사는 되풀이되는지 신기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통령을 중심으로 개혁이니 국민이니 허울좋은 말을 동원하여 새 정당을 만든다. 물갈이를 한다. 지금 민주당처럼 DJ세력을 아예 왕따를 만들어 놓는다거나, 한나라당처럼 5, 6공이라는 딱지를 붙여 내쫓는다.

우리 정당들은 과거는 몽땅 갈아엎고 매번 새로 시작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 당이 나온다. 그러니 과거로부터 축적이 없다. 매번 다시 시작하는데 무슨 유산과 전통이 생겨날 것인가. 오늘의 힘과, 지금의 시류만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된다.

*** 어떤 당 만들어낼 지 두고볼 일

또 하나 되풀이되는 것은 이런 일들이 자기들끼리만의 이전투구라는 점이다. 우리 국민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새 정권이 들어선 후 언론과 싸움하는 것밖에 기억되는 것이 없는데 이제는 새 정당을 만든다고 자기들끼리 치고 받는다. 정말 책임의식 있는 정치인, 정당이라면 지금 같은 나라 형편에 새 정당 어쩌고 할 수 있겠는가. 국민은 민주당이든, 신당이든 관심이 없다.

정권을 맡았으면 맡은 책임이나 제대로 해 달라는 것이다. 새 당이 없어서 나라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는가. 새 당이 나온다고 새 세상이 오지 않는다. 더 이상 속을 사람도 없다. 자기들만의 자리싸움이다. 어차피 선거란 최선의 선택이 아니라 차악(次惡)을 택하는 것이다. 기다리고 지켜보자. 여야가 어떤 당을 만들어 내는가를.

문창극 논설위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