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개 서체로 720종류의 천자문을 쓴 서예가 전정우(70) 심은미술관 관장의 첫 일본 전시회가 9일 도쿄에서 시작됐다. 도쿄 긴자시부야(銀座渋谷)화랑에서 15일까지 열린다.
“빨리 일본을 뒤집어 놓고 뉴욕도 뒤집어 놓자고 해서 빨리 하게 됐다.”
서예가 전정우씨, 9~15일 도쿄 긴자시부야 화랑서
이날 화랑에서 진행된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전 관장은 도쿄에서 첫 전시회를 열게 된 경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계기가 된 건 일본 서예 월간지 쇼도카이(書道界) 관계자들과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출신 서법 연구가들의 적극적인 추천이었다. 지난 2월 한국에서 전 관장의 작품을 처음 접한 이들이 “선생님을 세계적으로 알리기 위해선 먼저 도쿄같은 큰 무대에서 빨리 전시회를 열어야 한다”고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
전시장 확보가 만만치 않았지만,우연히 전시 예약이 취소된 화랑을 발견하면서 부랴부랴 두 달 만에 전시회를 열게 됐다는 설명이다.
이번 전시회엔 전 관장이 쓴 120개 서체의 천자문 작품들 중 초백서체ㆍ후마맹서체ㆍ화폐문자체 등 3개 서체의 천자문, 여러 서체를 혼용해 하나의 천자문을 완성한 심은혼융체 ‘농필천자문’ 등 25점이 전시된다. 심은혼융체의 '심은'은 전 관장의 호다.
지난 2월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한국과 일본 국민들을 감동시킨 여자 스피드 스케이팅 500m ‘이상화-고다이라 나오(小平奈緒)’의 우정을 부각한 특별 작품도 전시된다. 도쿄에서 열리는 전시회임을 감안해 전 관장이 특별하게 준비한 작품이다.
인천 강화도 출신으로 연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전 관장은 삼성그룹 비서실 등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30대 후반이던 1986년부터 본격적인 서예가로서의 길을 걸었다. 2000년엔 문을 닫은 강화의 초등학교를 자신의 호를 딴 심은미술관으로 꾸며 작품을 전시중이다.
다음은 전 관장과의 일문 일답
- 천자문을 120개 서체로 쓴 것을 알고 일본 전문가들이 혀를 내둘렀다는데.
- “천자문은 쓰기가 어렵다. 1000개 글자가 모두 다르니 한 자 한 자에 모두 정성을 들여서 써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 서예 작품은 두 자나 네 자 정도만 쓰면 되는데 천 개 글자를 모두 써야 하지 않나. 그리고 웬만한 서체들은 그 서체로 쓰인 글자들이 20~30개 정도만 전해 내려온다. 그래서 나머지 970자는 어떻게 써야 할 지를 자신이 직접 연구를 해서 써야 한다. 그래서 힘들다.”
- 이번 일본 전시회는 의미는.
- “서예 잡지 관계자를 비롯한 일본 전문가들이 높이 평가해 주셨다. ‘일본에서 전시를 하고 싶다’는 말을 단 한번도 꺼낸 적도 없는데 그 분들이 먼저 서둘러 주셨다. 이번은 작은 전시장에서 하지만 두 번 세 번 정도 더 일본에서 전시회를 할 생각이다. 향후 해외 진출의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쓰는 서예에서 보는 서예로’라는 지론을 갖고 있는데.
- “문자의 가독성만 따지면 한자로 쓰여진 서예 작품은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예 작품을 한ㆍ중ㆍ일 국민들만 즐기라는 법은 없지 않나. 서예의 획에는 사상과 철학이 그대로 녹아있다. 글씨는 힘차고 강건해야 하며 또 리드미컬해야 한다. 유연하면서도 강렬하고 깨끗해야 한다. 그래야 국가를 초월해 감동을 줄 수 있다.”
- 천자문을 쓰게 된 계기는
- “1986년 삼성 비서실을 그만 두고 계속 글을 쓰고 몇 번 전시회를 열어보니 ‘이제 공부가 좀 됐구나’싶더라 .그래서 2004년 ‘왜 5체(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로 모두 천자문을 쓴 사람이 없을까. 쓰면 큰 공부가 되겠다’고 생각해 쓰기 시작했다. 10년동안 쓰려고 했는데 3개월만에 다 썼다. 다른 체로 응용해 쓰기 시작하니 2년만에 30체로 다 썼다. 크게도 써보고,작게도 써보고, 종이에도 써보고 병풍으로도 써보고 했더니 120개 서체로 모두 720종류를 쓰게 됐다. 중국에선 원나라때 조맹부가 6체로 썼고, 일본에선 300년전에 3체로 쓴 사람이 있었고, 우리나라에선 600년전 한석봉 선생님이 2체로 천자문을 썼다.”
도쿄=서승욱 특파원 sswoo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