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칼럼

공정성의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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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는 기업이 잘돼야 나라가 잘된다고 믿는 사람이다. 기업이 있어야 일자리가 생기고 기업이 세금을 냄으로써 나라가 살림을 할 수 있다. 양극화 해소니, 분배의 정의니 떠들어도 나누어 줄 부(富)가 없이는 공허한 말들이다. 그 부를 만들어 내는 게 기업이고, 우리의 선반을 풍성케 만들어 주는 사람이 기업가다.

나는 사유재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재산권은 인권같이 천부적인 기본권이다. 재산 없이는 우리의 인권도, 자유도 지키기 힘들다. 재산이 없다면 우리 모두는 권력 앞에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공산주의가 성공하여 모든 국민을 먹여 살린다 해도 공산주의는 독재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된 생활을 꾸려갈 수 없는 개인은 무력하기 때문에 결국은 권력의 종속물이 될 수밖에 없다. 사유재산권은 상속의 자유와 맞닿아 있다. 만일 재산을 상속할 수 없다면 사람들은 아마 열심히 돈을 벌려고 애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열심히 벌면 내 자손들도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경제활동의 힘이 되기도 한다. 사유재산권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상속의 자유도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상속의 자유는 사회의 공정성과 갈등을 일으킨다. 자유경쟁을 기초로 하는 자본주의에서는 그 경쟁조건이 어떠한가라는 윤리문제가 발생한다. 100m 경주를 하는데 어떤 사람은 50m 앞에서, 어떤 사람은 이미 골인 지점에 가 있다면 출발선에 선 사람은 허탈할 수밖에 없다. 몇 년 전 작고한 하버드대의 존 롤스 교수는 '정의론'라는 책에서 사회 정의의 수준은 공동체가 결정한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는 평등의식이 강한 사회다. 자연히 상속문제도 다른 사회와 비교하여 더 엄격한 잣대를 요구한다.

현대자동차가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최근에도 비자금이 문제가 된 두산, 분식회계를 한 SK, 8000억원의 기부금을 낸 삼성 등 이 나라의 대기업들이 검찰 수사를 받았다. 재벌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시장경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공연히 조마조마해진다. 시장경제 자체가 위축될까 두려워서다. 권력이 이를 핑계로 사유재산제도 자체를 침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재벌들의 가장 큰 약점은 후계를 둘러싼 편법 상속이다. 이는 상속에 대한 기업 오너들의 의식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법인인 회사를 개인재산이라고 인식하여 회사를 물려주려는 데서 무리수가 나온다. 돈이나 땅을 물려주는 것과 회사를 물려주는 것은 다르다. 법인체인 회사는 이미 사회의 기관이다. 특히 공개법인의 경우 공적기관화됐다. 우리 현실에서 대기업은 재산이 아니라 일종의 권력이다. 회사를 물려준다는 것은 권력을 물려주는 셈이다. 법 정신으로 보면 소유한 주식만을 물려주는 것이 옳지, 법인체를 물려주는 것은 아니다.

이건희 회장의 삼성이나 정몽구 회장의 현대자동차는 2세 승계에는 성공했다. 경영 역시 탁월하게 잘해 회사를 도약시켰다. 물론 3세 역시 좋은 경영수업을 받아 훌륭한 경영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3세로 내려가니 이미 회사가 거대화하여 정당한 방법으로 주식을 물려주어서는 경영권을 확보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현실이다. 공정성을 위해서는 공동체가 양해할 수 있는 수준의 상속에 따른 부담을 져야 하는데 이를 피하다 보니 편법이 나오는 것이다. 오죽하면 검찰이 그룹들의 편법 상속에 대한 수사 실무 책자까지 만들었겠는가. 상속이 불투명해지면 자연히 사회정의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이런 부조리가 반기업.반시장주의자의 목소리를 크게 만든다. 이렇게 되면 자본주의 체제를 앞장서 지켜야 할 대기업가들이 오히려 자본주의를 허무는 사태를 초래한다.

미국도 어두운 기업 역사가 있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런 모순에 대해 "자본가들로부터 자본주의를 구하자"고까지 말했다. 지금 한국의 기업 오너들은 상속을 둘러싼 공정성 위기에 처해 있다. 공동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정의의 수준에 민감하지 못하면 기업의 위기뿐 아니라 시장경제 자체를 훼손하는 결과가 온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다만 우리의 기업 역사가 짧고 압축성장하는 바람에 기업들이 이에 대비할 여유가 없었던 이유도 있다. 공정성만을 너무 급하게 추구하다가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일 수도 있다는 점은 유의해야 한다.

문창극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