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자연대로 놔두자|김동호 <편집의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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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봄이 왔는가 했더니 벌써 여름이다.
「조지·기싱」은 『앞으로 몇번의 봄을 맞을수 있을 것인가』하고 탄식했다지만, 대지의 생명을 제대로 음미해볼 새도 없이 올해의 봄은 그렇게 짧게 가버렸다.
녹음이 짙어가는 산길을 걷고싶어지는 계절이다. 아가위나무꽃·붓꽃·초롱꽃이 피어나고 산비둘기·꿩·뻐꾸기·소쩍새 소리도 들려온다. 숲은 몸에 이로운 방향을 뿜어내고 있어 산림욕 삼아 산을 찾는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비서에게 일시키기 좋아하는 분들도 성인병예방에 좋다하여 등산만은 땀을 뻘뻘 흘리며 자기가 직접한다.
처음에는 곤충이 지나가고, 그 다음에 짐승이 지나가고, 그후엔 나무꾼이 지나가기 시작하여 이루어졌다는 그런 오솔길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
길 위에는 바람과 안개가 지나가고, 온갖 인간이 지나가 숱한 사연과 역사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길은 종류도 많다.
길가에 하얀 찔레꽃이 핀 어머니가 일하러 가는 들길, 마루턱에는 주막이 있고 그 너머에는 돌아갈 집이 있어 기쁨과 안도감을 주는 고갯길 (물론 한 많은 이별의 아리랑고개도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수탈 루트였던 신작로, 속도전의 심벌격인 고속도로, 갈라진 남과 북을 연결해주는 염원을 담은 통일로 등등….
노신에게 있어 길은 희망으로서의 길이었고, 새 생활을 구하여 이제부터 한발 한발 밟아나가야만 하는 길이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며 인간의 도리로서의 길이 강조되었고, 길은 우리가 가야 하고 가고자 하는 곳에 이끌어주는 방편이었다.
「탈레스」는 별을 보며 길을 걷다가 우물에 빠졌고, 시인 유치환과 김수영은 곰곰 생각에 잠겨 밤길을 걷다가 자동차에 받혀 타계하기도 했지만, 만남은 짧고 이별은 긴 우리의 삶에 있어서 길은 만남을 이루어주는 고마운 존재다. 그 만남은 의사소통이요, 대화요, 함께 세상을 살아감이다.
그러므로 길은 다양한 종류와 함께 각기 기능이 다르다. 오늘날 많은 길이 말끔히 포장되어 생활의 편리를 더해주고 있으나, 산길은 말할 것도 없고 계곡따라 나 있거나 유서 깊은 길은 가능한한 흙길인채로 놔두는 것이 좋다고본다.
차를 타고 휙 지나치는 것보다는 터벅터벅 걸으며 자연의 순리에 귀 기울이고, 멀고 가까운 역사를 되풀이해 생각해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예컨대 경북문경의 새잿길, 강원백담사 계곡길, 전북고창 읍성길등이 그런 경우다. 동서양의 사상가들은 숲속을 거닐며 생각을 가다듬었다는데 우리 보통사람들은 그렇게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심신을 건강하게는 할수 있을 것이다.
최근 내설악 백담사 진입로가 확장·포장된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다.
당국의 계획에 의하면 올해 설악산 개발을 위해 모두 25어4천여만원을 투입하는데 10억1천만원을 들여 인제군 북면 용대리∼백담사간 6.1㎞ 도로를 확장·포장하고 15억3천만원을 들여 속초 설악동·장수대·오색지구에 각종 시설을 한다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설악산 가운데 권금성·비선대등이 있는 외설악과 오색약수가 있는 남설악에는 관광객이 많은 편이고 백담사·수렴동계곡이 있는 내설악엔 등산객이 많다. 찾는 사람이 적은 내설악쪽이 덜 오염되었고 아직까지는 계곡과 바위와 나무들이 어우러진 비경이 보존되고 있다.
용대리에서 백담사까지 걷는 시오리길만 해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백개나 이어지는 담을 가진 맑은 계곡을 옆에 끼고 물소리·풀벌레소리를 들으며, 깊은 숲 향기를 맡으며 길을 걷노라면 이윽고 길옆 산속에서 흘러나오는 찬물이 갈증을 풀어주고, 거대한 낭떠러지를 지나 돌아서면 민족운동가인 한용운이 백제때 한동안 머물렀다는 조그마한 백담사가 나타난다.
백담사에서 시작되는 수렴동계곡은 더욱 유현하지만, 시오리 백담사계곡을 한국의 빼어난 계곡으로 다섯손가락 안에 꼽는 사람이 많다.
이 계곡길을 확장,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포장해 도시의 길처럼 만들어버리겠다니 실색하지 않을수없다. 만일 이 길을 확장·포장한다면 그 결과는 분명하다.
자동차를 몰고오는 관광객이 부쩍 늘어나 자연 정취는 사라지고 계곡은 온갗 쓰레기와 찌꺼기로 오염될 것이다. 백담사계곡이 오염되면 이제 그위 수렴동계곡이 더럽혀지기 시작할 것이다.
웅장한 지리산 노고단 바로 아래서 천은사까지 관통하는 도로가 수년의 공사끝에 올해안에 완공될것이란 말을 들었을 때 애석한 마음 금할수 없었던 터였다.
외설악을 오염시켰으면 됐지 내설악마저 오염시키려는가. 백담사 계곡길은 깊고 아름답고 장쾌하다. 이 계곡길은 경주의 남산과 함께 언제까지나 그대로 남겨두고 싶은 한국의 한 모습이다.
백담사계곡길 포장방침이 백담사근처에 관광호텔을 지으려는 숨은계획의 시작인지도 알수 없다. 개발만이 발전은 아니다. 자연은 한번 훼손되면 원상복구가 어렵기 때문에 개발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는 것도 훌륭한 자연보호라는 사실을 이제 많은 사람들은 알고있다.
무슨 일을 벌여야 생기는 것이있고, 가만히 있으면 불안하여 일을 벌이는지는 모르겠으나 백담사계곡길을 확장·포장한다는 것은 관광객 유치·주차장 마련을 위해 여주 신륵사 앞을 흐르는 남한강의 시원한 모래사장을 시멘트로 포장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당국은 백담사진입로 확장·포장계획을 즉시 철회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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