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비」의 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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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그날 밤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침전인 건청궁 곤령전에서 떨고 있었다. 흉도 들은 방문을 부수고 들어와 왕을 붙잡고 왕후(민비)의 폐출을 요구하는 문서를 내밀고 서명하도록 위협했다. 왕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흉도 들은 왕후의 거처를 대라고 호령했다. 왕은 왕후에게 피신할 시간을 주기 위해 짐짓 다른 방을 가리켰다. 그들은 왕의 면전에서 권총을 발사하기도 했다. 왕과 왕세자의 의관이 찢기고 밟혔다. -이것은 최근 일본에서 출간되어 화제가 된「쓰노다」의『민비 암살』에 나오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비극적인 일이 같은 시간 건청궁 서편 옥호루에서 벌어졌다. 한 떼의 흉도 들이 왕후의 침전인 옥호루에 난입, 울부짖는 여자들의 머리채를 끌어당기고 칼날을 가슴에 대고 왕후의 소재를 물었다.
흉도 들은 복장과 용모가 우아하여 왕후라고 생각되는 부인을 3명이나 살해했다. 이때 흉도 들은 어떤 궁녀로부터 왕후의 볼 위에 한 점 얽은 자국이 있다는 말을 듣고 즐비한 시체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과연 한 시체의 얼굴에서 얽은 자국을 발견했다.
남은 궁녀들에게 확인시킨즉 모두 왕후가 틀림없다고 증언했다.
그날은 1895년 8월19일. 민비의 치명상은 이마 위에 교차된 두 개의 칼날 자국에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쓰러져 있는 부인을 보았다. 잘 보니 가냘픈 몸매에 유순하게 생긴 얼굴과 횐 살결은 아무리 보아도 스물 대 여섯 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당시 민비는 44세). 그녀는 죽었다기보다 인형을 뉘어 놓은 것 같이 아름답게 영원히 잠들어 있었다….』당시 이 시해에 직접 가담했던 낭인중의 하나며 후에 구주 일일 신문사장을 지낸「고바야카와」의 기록이다.
이 같은「세기의 악역」을 연출한 일본은 지금까지 민비 사건을 자기네와 직접 관련이 없다고 부인해 왔다.
그러나 엊그제 「오쿠노」국토 방위 청 장관의 한국 침략 부인 발언을 따지는 일본 국회에서 민비 시해 사건의 주모자가 일본측이라는 사실이 간접 시인되었다.
역사적 진실은 아무리 눈을 가릴래 야 결코 가릴 수 없음을 다시금 일깨워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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