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내린 설욕 기회 놓치지 않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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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의 긴자 거리에서 19일 한 여성이 WBC 대회 한·일전 결과를 보도한 요미우리 신문 호외를 읽고 있다. [도쿄 AP=연합뉴스]

19일 오후 일본 열도 각지에서 일제히 환호성이 터졌다. 7회 초 대타 후쿠도메의 타구가 담장을 넘어가면서 팽팽한 접전이 깨지던 순간이었다. 일본 야구계와 팬들은 한국에 당한 2연패를 설욕한 것을 놓고 마치 우승컵을 거머쥔 것처럼 흥분했다. "이 기세를 살려 아마추어 최강 쿠바를 꺾고 세계 1위를 차지하자"는 기대도 넘치고 있다.

일요일이어서 석간 신문이 나오지 않는 이날, 일본 언론들은 호외를 찍어 승전보를 전했다. 요미우리 신문 호외에는 '일본, WBC 결승으로'란 통단 제목이 큼직하게 찍혔다. 일본 TV들도 이날 경기 결과를 저녁 뉴스 시간에 일제히 톱 뉴스로 전했다. 후쿠도메의 홈런 타구는 수없이 반복 방영됐다. 일본 언론들은 "신이 내린 설욕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고 표현했다. 이날의 승리에 대해 결승 진출이란 의미보다는 '일본 야구의 자존심 회복'이란 의미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16일 패배 뒤 격분을 감추지 못했던 간판스타 이치로도 여유 있는 표정을 되찾았다. 경기 직후 스즈키 이치로는 일본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이길 만한 팀이 이겼다. 만약 오늘도 한국에 졌다면 일본 야구사에 오점으로 남았을 것"이라고 소감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 야구계는 대회 시작 전만 해도 "야구는 일본이 한 수 위"라며 한국을 라이벌로 생각하지 않았다. 1차 리그에서 한국에 졌을 때도 "승부의 세계에선 있을 수 있는 일"쯤으로 치부했다. 그러다 2차 리그에서도 패배하자 "한국팀의 실력이 정말 세다"는 쪽으로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중학교 때까지 야구선수였다는 대학생 아다치 아키라는 "한국팀은 상상 외로 강했다"며 "오늘은 일본이 이겼지만 앞으로 양팀이 좋은 승부를 펼치는 호적수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스포츠 칼럼니스트 고토 신야는 "한국은 개개인의 능력을 본격적인 승부처에서 발휘하는 힘이 뛰어난 팀"이라며 "한때 한국 야구는 일본 야구를 본보기로 삼았으나 지금은 이를 뛰어넘어 본고장 미국식 야구를 익히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편 도쿄 신오쿠보와 오사카 이쿠노 등의 코리아타운에서는 교민들이 한국 식당 등지에 모여 열띤 응원을 펼쳤다. 도쿄의 한식당 '감자골'에서는 일본 팬들까지 몰려들어 북과 징을 동원한 양국 간 응원전이 식당 홀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몇몇 한식당은 응원 나온 손님에게 맥주와 음료를 무료로 제공했다.

"대~한민국"을 열창하며 2002년 월드컵 때의 응원 열기를 재현한 동포들은 한국팀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잘 싸웠다"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도쿄=예영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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