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연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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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미국 국민여러분, 방금 러시아를 영원히 소멸하는 법안에 서명했음을 알려 드리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폭격은 5분 후에 시작될 것입니다.
미국 방송 CBS와 CNN은1984년 8월12일 뉴스 시간에 이런 녹음을 들려주었다. 누구나 들으면 알 수 있는「레이건」대통령의 목소리였다.
「레이건」은 방송기술자들이 실황방송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마이크 테스트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때마침 두 방송이 그것을 그대로 녹음해 버렸다.
문제는「레이건」의 실수가 아니라 그와 같은 방송연습을 무심코 할 수 있는 대통령의 잠재의식에 있었다. 비록 농담이지만 은연중 자신의 호전성을 드러내 보여준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빗발치듯했다.
「레이건」은 지지난해 2월에도 비슷한 일을 저질렀다. 백악관 기자회견을 하면서 기자들이 하도 깐죽깐죽 물어 대니까 혼잣말로 입 속에서『새끼들 같으니라 구…』라고 중얼거렸다. 그 소리가 녹음테이프에 잡혀 역시 곤욕을 치렀다.
요즘 우리나라에선 총 선의 광란 속에서 때아닌 해프닝 방송이나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투표일을 하루 앞두고 제주도에서 아무개 후보가 몇만 표를 얻어 당선되었다는 뉴스가 한 방송을 통해 나갔다. 그 경우 역시 실황방송 중계연습을 하다가 벌어진 실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실수 그 자체보다 그런 실수 뒤에 숨은 잠재의식이 문제가 되었다. 투표일은 아직 하루나 남았는데 왜 하필이면 여당 후보가 벌써 당선된 양 보도연습을 했겠느냐는 것이다.
얘기는 다르지만 미국과 소련은 매일같이 하트라인(비상전화)의 이상유무를 확인하면서 서로 시 한 수씩을 낭송한다. 미국 쪽에서는「R·프로스트」의 시를 읊고 소련 쪽에서는「푸슈킨」의 작품을 읽는다. 살얼음판 같은 두 나라 외교무대의 뒤에 이런 멋있는 구석도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지금 제주도 하늘엔 갈매기가 3만5백6마리 날고 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1만4천3백t짜리 화물선이 달려가고 있습니다….』차라리 이런 방송연습이라도 했으면 웃음이라도 나올텐데, 일은 공교롭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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