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이재용 집유 … 법리와 상식에 따른 사법부 판단 존중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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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항소심 재판부가 어제 징역 5년의 1심 판결을 파기하고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이에 따라 약 1년간 구치소에서 수감 생활을 해 온 이 부회장이 석방됐다. 이 부회장과 함께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삼성 옛 미래전략실 고위 관계자들도 형이 줄고 집행이 유예돼 모두 풀려났다.

청탁 증거 없다는 항소심 판단은 합당 #특검 수사·1심 판결 오류 바로잡은 것 #재판장 공격은 법치주의에 대한 위협

항소심 재판부는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주장한 범죄사실 대부분을 무죄로 판단했다. 국회에서의 위증을 제외한 주요 혐의 중 인정된 것은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 승마훈련 지원과 관련한 뇌물 공여뿐이었다. 이 부분도 뇌물 인정액이 76억원에서 36억원으로 줄었다. 정씨에게 삼성 측이 말을 사준 것이 아니라 대여한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1심에서 유죄로 인정한 동계스포츠영재센터와 관련한 제3자 뇌물 공여, 최순실씨 지원 과정과 연관돼 있는 국외재산 도피와 범죄수익 은닉 혐의 등은 모두 무죄로 판단됐다.

항소심 재판부는 36억원 상당의 뇌물이 최씨 측에 전달됐지만 이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강요에 따른 것이었을 뿐 이 부회장이 청탁을 하기 위해 제공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요구성 뇌물’이라고 표현했다. 재판부는 또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이 부회장이 부정한 청탁을 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는 없다고 설명했다. 36억원의 뇌물이 경영권 승계 문제와 연계돼 있었던 것도 아니라는 게 항소심을 맡은 판사들이 내린 결론이다.

이 같은 법원의 판결은 ‘이 부회장이 삼성그룹 경영권을 승계하는 데 박 전 대통령의 도움을 받기 위해 청탁을 하고 그 대가로 최씨 측에게 뇌물을 건넸다’는 특검팀의 주장과 배치된다. 특검팀은 이 구도에 맞춰 고강도의 수사를 진행했지만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에게 ‘무엇을 어떻게 부탁했는지’를 법정에서 설명하지 못했다. 이에 이 부회장의 변호인들은 특검팀이 정황과 추론에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심 재판부는 ‘포괄적 현안’ ‘묵시적 청탁’ 등의 모호한 개념들을 사용하며 특검팀의 주장을 상당 부분 수용했다. 이 부회장에게 중형을 선고한 이 판결 뒤 법조계에서는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인 ‘증거재판주의’가 무너진 게 아니냐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상당수 국민은 절대 권력자인 현직 대통령이 기업 경영자에게 어떤 사람 또는 조직에 대한 지원을 요구했을 때 기업 측이 이를 거부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점, 기업인이 대통령을 상대로 경영 현안과 관련된 ‘거래’를 시도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라는 점에서 이 부회장에 대한 특검팀의 기소 내용이 과도하다고 생각해 왔다. 특검팀이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가 한 차례 기각된 뒤 법정 형량이 높은 국외재산 도피와 범죄수익 은닉 혐의를 추가했을 때는 ‘억지 수사’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최씨 측에 돈을 보낸 행위가 이 부회장이 재산을 빼돌리기 위한 것도, 회삿돈을 몰래 숨겨 놓기 위한 것도 아닌 게 자명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번 항소심 판결은 국민의 법 감정과 상식은 물론 철저한 법리와 증거에 따른 합리적 판단이라는 게 법조계의 중론이다.

항소심 재판부가 선고 때 지적한 대로 이 부회장과 삼성 측 고위 관계자들이 박 전 대통령과 최씨의 요구에 응한 것은 분명한 불법 행위다. 이 부회장도 석방되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다시 한번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제 이 부회장은 “지난 1년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다짐대로 보다 투명한 경영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 부회장은 포스트 반도체·스마트폰의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데도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 이미 삼성의 스마트폰 시장점유율은 추락 중이고, 반도체 상황도 녹록지 않다.

이 부회장에 대판 재판은 1·2심을 거치며 1년 가까이 진행돼 왔다. 특검팀 측의 상고로 최종 결론은 대법원에서 날 가능성이 크지만 그때까지 항소심 판단은 존중돼야 한다. 이미 이번 재판을 주재한 정형식 서울고법 부장판사에 대한 인신공격이 잇따르고 있다. “정 부장판사와 그 가족의 계좌까지 털어보자”는 협박은 법치주의에 대한 모독이며 우리 공동체를 파괴하는 중대한 위협이다. 정치권부터 정파적 시각으로 재판 결과를 재단해선 안 된다. 사회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고 법리와 증거에 따라 소신 있게 내린 판결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건강한 사회의 증표다. 그것이 3권분립 원칙에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