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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살린 엄마의 차가운 한마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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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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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게 낫겠니?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래도 돼.”

단 한 번의 불장난 결과는 참혹했다. 몸 87%에 3도 화상을 입은 아홉 살 소년의 생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엄마를 보자마자 공포에 질려 “나 이제 죽는 거야?”라고 물었다. 위로가 필요했다. 하지만 ‘항상 모든 일을 좋아지게 만들어 준 해결사’였던 엄마는 아들과 눈을 맞추며 이렇게 말했다. “죽고 싶다면 그래도 돼. 누구의 선택도 아닌 네 선택이야. 네 삶의 주인은 너야. 하지만 살고 싶으면 모든 걸 다 걸고 싸워. 엄마가 매 순간 함께할게.”

아들은 ‘살겠다’는 자신의 선택대로 죽지 않고 살았다. 감당하기 어려운 그 모든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참아 내고 지금은 아내와 네 아이를 둔 세계적 강연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온 파이어』의 존 오리어리(39) 얘기다.

“인생의 길을 늘 선택할 수는 없지만 그 길을 걷는 방식은 언제나 선택할 수 있다”며 “세상이나 누군가를 탓하며 수동적으로 살아가지 말라”는 오리어리의 메시지는 고통스러운 경험이 깔려 있기에 더 강한 울림을 준다. 누구라도 그의 인생 이야기를 접하면 조금만 불편하고 억울해도 불만에 차서 징징대던 스스로를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나 역시 그랬다.

한편으론 지금의 기적 같은 삶만 놓고 보면 그가 태어날 때부터 남다르게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기에 이 모든 걸 이뤄 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스스로 회고하듯 화재사고 전까지만 해도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주고 모든 책임을 대신 져 주는 부모가 주는 행복을 당연하게 누리던’ 개구쟁이 소년이었을 뿐이다. 그런 철부지가 생사를 넘나드는 어려운 싸움을 할 수 있도록 바꿔 놓은 건 “죽음도 네 선택”이라는 냉혈한 같은 엄마의 한마디였다. 그저 “다 괜찮을 거야”라고 말하는 게 훨씬 쉬웠을 텐데 엄마는 아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꼭 필요한 진실을 알려 주는 고통스러운 선택을 했다.

나라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비단 아들을 키우는 엄마로서가 아니라 소위 기성세대로서 스스로를 돌아봤다. 삶에 맞설 용기가 필요할 때 얄팍한 위로를 하느라 오히려 앞에 놓인 기회를 빼앗은 건 아닐까. 용기가 필요한 세상에 이 차가운 한마디가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