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99년생은 이미 승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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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나현철
나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나현철 논설위원

나현철 논설위원

“오전에 암송을 하고 오후에 필기 연습을 했다. 시험을 봤는데 암송할 때 불필요한 동작을 한다고 선생님에게 맞았다. 필기도 제대로 못해 또 맞았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박물관에 있는 기원전 2000년께 수메르인의 점토판 내용이다. 공부에 시달리다 지친 학생이 일기처럼 푸념을 적어놨다. 예나 지금이나 공부란 게 그리 만만치 않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게 시험이다. 봤던 문제도 알쏭달쏭하고 아는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결과에 대한 부담감이 클 땐 더 그렇다. 밤샘 공부를 하다가 오히려 시험을 망치기도 한다. 그래서 수능 같은 큰 시험을 앞두곤 컨디션 조절이 제일이다. 경험상 서너 문제는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 59만 수험생도 지난 목요일로 예정된 수학능력평가를 앞두고 몸과 마음을 관리하는 데 애썼을 것이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포항 지진으로 수능이 일주일 연기됐다. 포항 지역 피해가 크고, 여진을 걱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학생들로선 당혹스러운 일이다. 수능에 모든 것을 맞춰 놨는데 갑자기 연기라니…. 100m 달리기 출발 직전 경기가 취소된 거나 마찬가지다. 부모 입장에서도 예정에 없는 공부를 일주일 더 하는 아들딸이 안쓰럽기만 하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들의 반응이 의외다. “포항 애들 너무 안 됐다. 그 친구들도 잘됐으면 좋겠다.” 수능 연기 소식을 접한 고3 딸의 첫마디였다. 딸이 보여준 반 카톡방에도 포항 학생들의 안위를 걱정하며 시험을 잘 치르기를 기원하는 글이 가득했다. 주변 학부모들도 비슷한 반응을 봤다며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이 큰 것 같다”고 했다.

대견한 청년들이다. 99년생은 초등학교 때 신종플루, 중학교 때 세월호, 고교 때 메르스를 겪었다. 그래서 아홉수가 여러 겹 끼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그건 기성세대의 관점일 뿐이다. 그 많은 위기를 지나며 아이들은 어른들이 잊고 있던 공동체 의식을 키워 가고 있었다. 내가 그런 일을 겪을 수 있고, 그럴 경우 다른 사람들이 배려하고 이해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수능 연기가 아니었다면 99년생들의 그 소중한 마음을 알아채지 못할 뻔했다. 아직 수능을 치르지 않았지만 99년생은 이미 승자다. 그 마음이 좋은 성적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나현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