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거짓말을 하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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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혜준양 유괴사건은 경찰이 유력한 용의자 2명을 공개수배함으로써 범인검거는 시간문제가 된 것 같다. 용의자 가운데 한명이 투신자살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잠적해 버리긴 했으나 아무래도 위장 자살극일 가능성이 짙어 이들은 독 안에 든 쥐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국민의 관심은 범인검거보다 혜준양의 생사여부, 그리고 시민의 제보로 검거했던 용의자를 놓쳐버린 경찰에 쏠리고 있다.
시민제보로 검거한 용의자를 놓친 경찰의 이완된 근무자세도 문제지만 정작 더 서글프고 한심한 일은 경찰의 허위보고 작태다.
경찰은 혜준양의 부모로부터 범인의 목소리가 전화의 목소리와 같다는 진술까지 받고 동행수사하던 중 그물에 들어온 고기를 놓쳐버리고는 『혐의가 없어 풀어주었다』고 상부에 허위 보고했다.
뿐더러 이 사실을 정당화하기 위해 용의자의 가족으로부터 신원보증서를 어거지로 받아내 무혐의로 풀어준 것처럼 위장하기까지 했다.
우리는 여기서 상습화되고 고질화되다시피한 경찰의 은폐, 조작 작태에 개탄과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경찰 수뇌부가 앞장서 국민을 농락하고 기만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조작은 제쳐놓더라도 경찰이 허위보고와 조작으로 오염된 듯한 느낌마저 준다.
서울 대공원파출소 무기고 습격 사건때도 경찰은 검찰등 상부기관에 거짓보고를 했다. 다행히 범인일당 4명이 조기 검거돼 현장검증결과 거짓이 밝혀졌지만 경찰은 문책이 두려워 실황을 왜곡했다고 한다.
경찰이 인신매매로 넘겨졌던 여성을 가족에게 인계하면서 돈을 뜯어 말썽이 됐던 서울 연신파출소 금품강요사건도 예외가 아니다.
엉뚱한 시민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가면서 허위보고를 했다가 들통이 났다. 금방 들통이 날게 뻔한 사실을 호도하고 날조해 위기를 모면해보려는 악습이 경찰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조직 내 구석구석까지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면 이게 어디 예사 일인가.
신문에 보도가 되면 사실과 다르다며 발뺌부터 하고 허위보도니, 오보니하고 오히려 윽박지르는 체질화된 거짓 풍조의 만연은 경찰의 위기적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정직해야할 정부, 그 중에서도 국민의 신뢰의 대상이어야 할 경찰의 모습이 이토록 타락하고 부도덕한 존재가 되어서야 되겠는지 개탄스럽다. 이래가지고 어떻게 법질서를 지탱하고 부정과 부패를 도려내며 정의를 구현하는 국가기관으로 존립할 수 있겠는가.
경찰이 거짓말을 일삼고 경찰고위간부까지 국민을 속이려들면 그 사회는 신뢰의 기반이 무너지고 만다. 경찰의 수사가 불신을 받게되면 법과 형사사법제도마저 불신하게 되며 끝내는 국가의 존립기반까지 흔들리게 된다.
정직한 정부, 공권력의 정당성과 신뢰회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거짓말하는 경찰의 악습과 체질부터 뜯어고치는 일이 급선무다. 법과 정부의 권위 및 존엄, 믿고 사는 사회의 조성을 위해서도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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