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뚜껑은 재활용품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재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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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캇 서울에서 열리는 국내 첫 개인전에 선보인 엘 아나추이의 태피스트리 작품. 사진=이후남 기자

바라캇 서울에서 열리는 국내 첫 개인전에 선보인 엘 아나추이의 태피스트리 작품. 사진=이후남 기자

 “제가 활용하는 소재는 이미 사람들이 사용했던 것, 만진 것, 숨결이 닿은 겁니다. 사람들이 만진 물건은 DNA나 에너지가 남아있는 것 같아요. 그런 물건이 작품 소재가 되면 사람과 사람의 연결 고리가 됩니다. 각자의 역사,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죠."

가나 출신 세계적 현대미술가 엘 아나추이 #삼청로 바라캇 서울에서 첫 국내 개인전 #대형 태피스트리 작품과 판화 등 선보여

태피스트리 작품 앞에 선 엘 아나추이. 사진=이후남 기자

태피스트리 작품 앞에 선 엘 아나추이. 사진=이후남 기자

 서울 삼청로에 자리한 '바라캇 서울'에서 만난 미술작가 엘 아나추이(73)의 말이다. 이곳에선 그의 첫 한국 개인전 ‘엘 아나추이:관용의 토폴로지’가 열리고 있다. 가나에서 나고 자라 나이지리아에서 활동해온 그는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평생공로상을 받은 것을 비롯, 아프리카 출신으로 세계적 명성을 쌓은 대표적인 현대미술가로 꼽힌다.

서울 삼청로 바라캇 서울에서 열리는 국내 첫 개인전에 선보인 엘 아나추이의 태피스트리 작품. 사진=이후남 기자

서울 삼청로 바라캇 서울에서 열리는 국내 첫 개인전에 선보인 엘 아나추이의 태피스트리 작품. 사진=이후남 기자

 특히 금속 재료를 엮어 큼직한 걸개나 벽장식처럼 만든 태피스트리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번 전시에서도 단연 눈길을 끄는 건 세 점의 대형 태피스트리 작품이다. 황금빛을 비롯한 색채가 조명에 반짝이는 모습이 그 자체로 아름답다. 때로는 마치 그물이나 갑옷 같기도 하다. 주된 재료는 병뚜껑이다. 음료수병이나 술병에 흔히 쓰이는 알루미늄 뚜껑을 모아 이리저리 공들여 손질한 뒤 구리선으로 연결해 마치 직물처럼 섬세하게 엮었다. 노랑, 빨강 같은 색상 역시 현지에서 병뚜껑에 흔히 쓰는 색깔대로다. 버려진 병뚜껑의 화려한 변신이다.

병뚜껑을 손질한 뒤 구리선으로 연결해 만든 태피스트리 작품의 부분을 확대한 모습. 사진=이후남 기자

병뚜껑을 손질한 뒤 구리선으로 연결해 만든 태피스트리 작품의 부분을 확대한 모습. 사진=이후남 기자

 하지만 작가는 “재활용이 아니다”라고 뚜렷이 선을 그었다. “제가 사용하는 건 쓰레기가 아니라 소재에요. 저는 조각하는 사람이라 늘 소재에 관심이 많았죠. 거리에 병뚜껑이 많으니까 작업실에 가져와 두고 이걸로 어떻게 사람들과 소통할까를 생각했어요.” 그는 1970년대 중반 나이지리아 대학교수가 된 것을 계기로 이 대학이 자리한 도시에서 40여년 간 작품활동을 해왔다. 99년쯤부터 병뚜껑으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도 여기에서다. 병뚜껑을 가공하는 과정을 비롯, 그의 작업에는 이 지역 사람들이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렸을 때 장난감을 사지 않고 주변에 있는 걸로 갖고 놀았죠. 나는 예술이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주변에 있는 것, 자신의 환경에서 창조한 것이라야 자신의 얘기를 할 수 있고 나와 남을 연결시켜 줄 수 있죠."

병뚜껑을 손질한 뒤 구리선으로 연결해 만든 태피스트리 작품의 부분을 확대한 모습. 사진=이후남 기자

병뚜껑을 손질한 뒤 구리선으로 연결해 만든 태피스트리 작품의 부분을 확대한 모습. 사진=이후남 기자

 이런 생각의 배경에는 한국처럼 과거 식민지배를 겪은 가나의 역사, 그 자신도 성장기에 서구의 예술과 문화만을 배웠던 경험이 자리하는 듯 했다. “성인이 되고 미술을 전공하면서 그동안의 교육에 빠진 게 있구나 싶었죠. 우리 지역의 문화입니다. 예술을 시작하며 소재든 매체든 저를 둘러싼 환경, 문화, 전통을 연결하려는 시도를 해왔습니다.“
 병뚜껑 같은 금속재료에 앞서 초기에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나무로 만든 둥근 쟁반이다. 이를 한층 새로운 방식으로 구현한 판화작품들도 이번 개인전에 선보인다. “우리 지역에서는 둥근 나무 쟁반을 사람들이 음식을 나눌 때도 써요. 먹는 것, 사람들을 살찌우고 풍요롭게 하는 것과 관련 있죠. 병뚜껑도 먹고 마시는 것과 관련 있고.”

서울 삼청동 바라캇 서울에서 열리는 국내 첫 개인전에 선보인 엘 아나추이의 태피스트리 작품. 사진=이후남 기자

서울 삼청동 바라캇 서울에서 열리는 국내 첫 개인전에 선보인 엘 아나추이의 태피스트리 작품. 사진=이후남 기자

 과거 광주비엔날레에서 참여, 이미 한국을 다녀간 바 있는 그는 “우리는 각자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며 “예술에 제1세계, 제3세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저같은 작가가 세계무대에 소개될 때면 출신 지역으로 규정되곤 합니다. 아마 한국작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하지만 예술은 예술일뿐입니다." 이번 개인전은 11월 26일까지.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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