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나라에 살기 때문에 병에 걸리고 그 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불평등은 반드시 끝나야 합니다.”
세계 3대 감염병(에이즈·결핵·말라리아) 퇴치를 위한 국제기금 ‘글로벌펀드’의 크리스토프 벤 대외협력 이사는 최근 서울 여의도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3대 감염병 퇴치 국제기금 '글로벌펀드' #크리스토프 벤 대외협력 이사 방한인터뷰 #100여개국 40억달러 지원, 민간 최대규모 #북한에도 결핵,말라리아 퇴치 지원 #한국, 2004년 이후 3300만달러 기부 #누적 기여금 23위…日 5위, 中 20위 #벤 "한국, 자금·기술 양면에서 잠재력" #2030년까지 3대 감염병 종식 목표 #
제네바에 본부를 둔 글로벌펀드는 3대 감염병 퇴치를 위해 2002년 설립된 민관협력 파트너십이다. 100여개국에 연간 40억달러(4조 5000억원)를 지원한다. 전세계 에이즈 퇴치 비용의 20%, 결핵의 65%, 말라리아의 50%가 이 곳에서 나온다.
글로벌펀드는 15년간 1700만명의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지원 국가에서는 세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1/3 수준으로 낮아졌다.
벤 이사는 “목표 달성을 위해 시기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와 있다”고 평가했다. 글로벌펀드의 최종 목표는 2030년까지 개발도상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에서 3대 감염병의 뿌리를 뽑는 것이다.
“지금까지 잘 해왔지만 더 강하게 밀고 나가지 않으면 완성할 수 없어요.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이기 때문에 더 많은 선진국들이 책임을 가지고 연대해야 합니다.”
기금의 94%는 각 정부들에서 부담한다. 미국·프랑스·영국·독일 등 선진국의 역할이 크다. 15년간 누적 기여금 1위인 미국은 2위 프랑스의 3배 가까운 120억달러(약 13조 5000억원)를 냈다.
한국은 2004년 글로벌펀드에 처음 참여해 지난해까지 3300만달러(약 369억원)를 지원했다. 벤 이사는 매년 한국을 방문해 외교부·복지부·코이카 등을 만나 협력 유지를 위한 신뢰관계를 다져왔다. 그는 한국이 국제 보건에 보다 더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평가했다.
“질병 종식을 위해서는 자금과 기술이 필요합니다. 선진국이면서 혁신적인 의료기술 가진 한국은 두 가지 영역 모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2017~2019년 기여금 규모를 기존 수준(2014~2016년)인 연평균 400만달러(약 45억원)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반면 일본은 46%, 캐나다는 24%, 호주는 10%를 올렸다.
한국의 누적 기여금 순위는 GDP 규모가 비슷한 캐나다(7위)와 호주(13위)보다 낮은 23위다. 이때문에 국제사회의 보건 영역에 대한 한국의 기여도를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벤 이사는 “한국은 항공권연대기여금(국제선 항공권 가격에서 1000원씩을 개발도상국의 질병퇴치기금으로 적립하는 제도) 등을 통해 추가 자금 확보를 위한 혁신적인 시도를 하고 있다”며 “이처럼 다양한 방법을 구상해 나간다면 한국과 글로벌펀드가 더 강력한 파트너십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글로벌펀드는 북한을 지원하는 몇 안 되는 국제기구 중 하나다. 2010년부터 결핵·말라리아 퇴치를 위해 치료약과 모기장 등을 지원하고 있다. 벤 이사는 “북한은 결핵 발병률 전세계 1위이고 이는 국경이 맞닿은 남한에도 위협이 될 수 있다”며 “핵 실험 등 국제정세와 별개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북한을 돕는 것은 당연하다. 정부가 아닌 주민을 돕는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펀드가 7년 동안 북한에 지원한 누적 금액은 9451만달러(약 1067억원)로, 한국이 글로벌펀드에 기부한 전체 금액의 3배에 가깝다.
벤 이사는 열대의학을 전공한 의사이기도 하다. 그는 30년 전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시골 병원에서 에이즈의 참상을 목격했다. 치료약도 없는 시기였다.
그는 “병으로 인해 마을이 완전히 사라지는 과정을 경험하며 충격으로 영혼이 떨렸다”고 표현했다. 1996년 에이즈 백신이 개발됐지만 부유한 나라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벤 이사는 이때부터 ‘가난한 나라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죽어선 안 된다’는 철학을 갖고 국제보건에 종사해왔다.
3대 감염병의 위협은 여전히 강력하다. 2016년 에이즈로 100만명, 2015년 결핵으로 180만명이 사망했다. 열대지역을 중심으로 세계 인구의 절반인 32억명이 말라리아 감염에 노출돼 있다.
“질병 문제는 국경 안에서, 내 이웃에게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끝나지 않습니다. 나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문제를 막는 것, 그것이 글로벌펀드의 핵심이고 세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 아닐까요.”
백수진 기자 peck.sooj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