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송진 채취 흉터안고 꿋꿋한 춘양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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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4호 면

경상북도 봉화군 비룡산(해발 1120m) 8부 능선. 가시덤불을 헤쳐가며 다다른 소나무 군락지. 말로만 듣던 춘양목(봉화 지역의 소나무)들이 붉은 갑옷을 껴입은 채 하늘을 찌를 듯 당당하게 서 있다. 소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솔향에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하다.

경북 봉화 비룡산 춘양목이 상처를 안고도 당당하게 서있다.

경북 봉화 비룡산 춘양목이 상처를 안고도 당당하게 서있다.

산을 오르느라 거칠어졌던 숨을 고르고 나서야 괴기스러운 ‘V’자 형태의 칼자국이 눈에 띈다. 아름드리 소나무마다 촘촘하게 그어댄 하사관 계급장을 연상시키는 두세 뼘 크기의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동행한 봉화 주민 권오문씨는 “예로부터 춘양목으로 유명한 이 일대에는 일제가 남긴 아픈 역사를 증명하고 있는 소나무들이 즐비하다”고 설명했다. 그들은 사람, 역사, 문화뿐만 아니라 소나무에까지 칼을 들이대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일제는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촘촘하게 칼집을 내 송진을 채취했다.

일제는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촘촘하게 칼집을 내 송진을 채취했다.

일제 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수탈에 혈안이 된 일본은 위안부와 강제징용도 모자라 소나무까지 눈독을 들였다. 송진에서 기름 채취가 가능한 사실을 알고 조선 전역의 질 좋은 소나무를 칼질해 전쟁물자로 사용했다. 국립산림과학원 산림생태연구과 이민주 연구원은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에 따르면 1943년 한해에만 전국에서 4000t의 송진을 채취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춘양목으로 불리는 봉화지역의 소나무는 다른 소나무에 비해 더 강하다.

춘양목으로 불리는 봉화지역의 소나무는 다른 소나무에 비해 더 강하다.

지워지지 않는 흉한 문신을 안고도 쓰러지지 않고 이 땅을 지키고 있는 소나무들이 광복 72주년을 맞는 오늘도 일제의 만행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춘양목

우리가 간직하고 보존해야 할 것은 값비싸고 아름다운 소나무만이 아니라, 민족의 아픈 역사를 온몸에 새긴 바로 이 소나무들 아닐까. 김경빈 기자 kgbo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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