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송진 채취, 흉터 안고 꿋꿋한 춘양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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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4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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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봉화군 비룡산(해발 1120m) 8부 능선. 가시덤불을 헤쳐 가며 다다른 소나무 군락지. 말로만 듣던 춘양목(봉화 지역의 소나무)들이 붉은 갑옷을 껴입은 채 하늘을 찌를 듯 당당하게 서 있다. 산을 오르느라 거칠어진 숨을 고르고 나서야 괴기스러운 ‘V’자 형태의 칼자국이 눈에 띈다. 아름드리 소나무마다 촘촘하게 그어 댄 하사관 계급장을 연상시키는 두세 뼘 크기의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동행한 봉화 주민 권오문씨는 “예로부터 춘양목으로 유명한 이 일대에는 일제가 남긴 아픈 역사를 증명하고 있는 소나무들이 즐비하다”고 설명했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수탈에 혈안이 된 일본은 위안부와 강제징용도 모자라 소나무까지 눈독을 들였다. 송진에서 기름채취가 가능한 사실을 알고 조선 전역의 질 좋은 소나무들을 칼질해 전쟁 물자로 사용했다. 국립산림과학원 산림생태연구과 이민주 연구원은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에 1943년 한 해에만 전국에서 4000t의 송진을 채취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지워지지 않는 흉한 문신을 안고도 쓰러지지 않고 이 땅을 지키고 있는 소나무들이 광복 72주년을 맞는 오늘도 일제의 만행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우리가 간직하고 보존해야 할 것은 값비싸고 아름다운 소나무만이 아니라, 민족의 아픈 역사를 온몸에 새긴 바로 이 소나무들 아닐까.

김경빈 기자 kgbo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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