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원정 기자의 주(酒)토피아] '오! 수정'의 와사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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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술은 달면 못쓴다는 지론을 가진 술꾼들도 사족을 못 쓰는 달착지근한 ‘주(酒)님’이 있으니 바로 막걸리입니다. 다른 계절은 몰라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장마철이면 시금털털한 막걸리 한잔이 간절해지는 게 저뿐 아닐 겁니다. 여름의 후텁지근한 열기를 처마에 떨어지는 빗줄기로 식히며 시원하게 한 모금. 그리고 마음 맞는 이들과의 기분 좋은 잡담. 이 아름다운 조합을 가장 잘 활용하는 영화감독으로 홍상수 감독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가 매 작품 새겨온 ‘취한 남녀들의 시간’을 글로 풀면 단행본 한 권쯤은 거뜬합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은 영화로, 저는 주저하지 않고 故 이은주 주연의 흑백영화 ‘오! 수정’(2000)을 꼽겠습니다. 이은주가 연기하는 젊은 방송작가 수정은 독립 제작 방식의 영화감독을 꿈꾸는 중년의 방송 PD 영수(문성근)에게 기습 키스를 당한 후 가까운 사이가 되지만, 영수의 부유한 후배 재훈(정보석)과 억지로 키스를 한 후 그와 비밀리에 사귀게 됩니다.

대학에 들어가 정신없이 술을 배운 20대 시절에는 정작 이 영화를 보며 ‘그래, 술 먹다 보면 남녀 사이 저런 일이야 다반사지’하며 수정에게 매달리는 재훈이 안쓰럽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30대 들어 다시 보니 전적으로 수정의 입장에서 심란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에게 반강제적으로 섹스를 원하던 남자들은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사과는커녕 떼를 쓰거나, 자기 체면을 챙기기에 더 바쁩니다. 먹고사는 일이 고된 수정에겐 출구조차 없어 보입니다. 두 남자와 막걸리를 마시던 그가 화가 난 듯 벌컥벌컥 잔을 들이키는 모습이 10년 전과 다르게 느껴졌던 이유입니다. 사는 게 얼마나 복장 터지면 저렇게 마실까.

그런데 이 장면이 촬영된 막걸리 집에서 벽을 어지럽게 채운 낙서들을 들여다보노라면, 세상에 수정 같은 여자가 얼마나 많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서울 종로 피맛골의 ‘와사등’이란 곳인데요. 올해로 거의 60년째 한 자리를 지켜온 명물입니다. 참고로, 홍상수 감독은 또 다른 흑백영화 ‘북촌방향’(2011)도 여기서 찍었습니다.

인사동 뒷골목 구석에 있는 데다, 간판도 없어 처음 가면 지나치기 십상입니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더듬더듬 찾아가면, 간이 테이블 서넛이 다닥다닥 붙은 손바닥만 한 마당이 나옵니다. 마당 안쪽 허름한 단층 건물의 열린 대문으로 이면수 굽는 냄새가 구수하게 풍겨옵니다. 누가 얼마나 오든, 테이블당 양푼막걸리에 이면수 구이 하나가 기본입니다. 머리가 복잡해서 찾아온 이들에겐 그 단순함이 오히려 위로가 됩니다. 여름이면 큼직한 창문을 죄다 열어, 안과 밖의 구분이 무색해집니다. 덕분에, 삶이 비루할 때 빗소리를 들으며 속에 치민 울화를 다스리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지요. 그러니 오늘 와사등에서 한잔, 어떠세요.

와사등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0
02-723-9046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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