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지문과 발자국으로 15년 만에 잡은 살인범, '태완이법' 덕분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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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로 남을 뻔 한 강도·살인사건의 범인이 15년 만에 붙잡혔다. 단서는 사건 현장에 있던 맥주병에서 발견된 쪽지문(작은 지문), 그리고 발자국 일부였다.

서울경찰청 중요미제사건수사팀은 2002년 서울 구로구의 한 호프집 여주인을 살해한 혐의(강도살인)로 장모(52)씨를 구속했다고 5일 밝혔다.

사건 발생 당시 경찰이 배포한 공개수배지. [사진 서울경찰청]

사건 발생 당시 경찰이 배포한 공개수배지. [사진 서울경찰청]

사건이 발생한 건 지난 2002년 12월 14일. 공사장에서 타일공 보조로 일을 하던 장씨는 이날 오전 1시30분쯤 서울 구로구에 있는 한 호프집에 들어가 맥주를 마셨다. 그러다 오전 2시30분쯤 종업원이 퇴근하고 여주인 A(당시 50세·여)씨가 혼자 남자 자신의 가방에서 둔기를 꺼내 A씨의 머리와 얼굴, 어깨 등을 수차례 내리쳤다. 장씨는 A씨의 사체를 가게 안쪽에 숨기고 현장을 깔끔히 정리한 후 A씨 가방을 든 채 도주했다. 가방 안에 들어있던 현금과 카드로는 인근 상점에서 65만8000원 상당의 물품을 구입했다.

지난 2002년 사건이 발생했던 현장. [사진 서울경찰청]

지난 2002년 사건이 발생했던 현장. [사진 서울경찰청]

지난 2002년 사건이 벌어졌던 서울 구로구 호프집. [사진 서울경찰청]

지난 2002년 사건이 벌어졌던 서울 구로구 호프집. [사진 서울경찰청]

당시 사건을 수사했던 서울 남부경찰서(현 금천경찰서)는 사건 발생 직전 현장에 있었던 종업원과 장씨가 들른 상점 주인 등 목격자의 진술을 토대로 몽타주를 작성해 수배했다. 하지만 인상착의와 맥주병에 남아있던 작은 쪽지문, 발자국 일부 외엔 별다른 단서가 없어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영원히 덮힐 줄 알았던 이 사건을 경찰이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한 건 지난해 1월이다. 2015년 살인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한 일명 '태완이법'이 시행되면서 올해 12월까지던 이 사건의 공소시효도 소멸된 것이다. 서울경찰청은 태완이법 시행 이후 중요미제사건수사팀을 편성해 주요 미제사건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호프집 살인사건'도 그 중 하나였다.

금천경찰서에서 받아온 자료를 검토하던 경찰은 쪽지문과 발자국 등 피의자가 남긴 '흔적'에 주목했다. 쪽지문의 경우 오른쪽 엄지의 3분의 1 정도의 크기였지만, 2012년 도입한 지문자동식별시스템(AFIS)을 활용해 특징점 10여 개를 찾아냈다. 수사팀은 이 특징점을 전체 지문 데이터베이스와 비교해 피의자로 장씨를 특정했다.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경찰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형사과 중요미제사건수사팀장인 정지일 경감이 15년 동안 장기미제 사건으로 남아있었던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호프집 살인사건 범인 검거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경찰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형사과 중요미제사건수사팀장인 정지일 경감이 15년 동안 장기미제 사건으로 남아있었던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호프집 살인사건 범인 검거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피의자가 사건 현장에 남긴 발자국의 형태가 뒷굽이 높고 둥근 '키높이' 형태라는 점을 눈여겨 본 경찰은 장씨의 집을 압수수색하면서 그와 비슷한 모양의 신발 2점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사건 당일 신은 신발은 아니었지만 키가 160~165㎝로 '단신'인 그가 평소 즐겨신는 신발 스타일이었다. 그렇게 경찰은 지난달 26일 장씨를 검거했다.

경찰 검거 당시 장씨는 발뺌했지만 구속 영장이 발부되자 범행 사실을 시인했다. 장씨는 범행 동기에 대해 "가게 밖에 있던 쇠파이프를 갖고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경찰은 피해자 머리에 있던 상흔을 봤을 때 망치와 같은 둔기를 사용했고 그가 가방에 둔기를 미리 준비한 뒤 계획적으로 범행했다고 파악하고 있다.

태완이법 시행 이후 경찰이 장기 미제사건을 해결한 건 처음이 아니다. 최근 경찰은 '아산 갱티고개 살인사건'의 피의자 2명을 15년 만에 붙잡았다. 이 사건은 2002년 4월 40대 노래방 여주인이 목 졸려 살해된 뒤 충남 아산의 갱티고개 인근에 유기된 사건이다. 당시 경찰은 전담팀을 꾸려 범인 추적에 나섰지만 단서를 잡지 못했다. 지난해 9월에는 경기도 용인시에서 2001년 6월 금품을 노리고 단독주택에 침입한 뒤 흉기를 휘둘러 1명을 살해하고 1명에게 상해를 입힌 피의자가 뒤늦게 검거됐다.

하준호 기자 ha.junho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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