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일 비자면제 한·일 외교경색 푸는 계기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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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일본 정부가 6일 관광.상용.통과 목적으로 최장 90일 동안 일본을 방문하는 한국인에 대해 비자를 항구적으로 면제한다고 발표했다.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같은 날 한국 정부도 상응하는 조치를 취했다. 1995년부터 1년 단위로 연장해 온 일본인에 대한 단기비자 면제 조치를 무기한 연장하고, 30일로 돼 있던 체류 허용기간도 90일로 늘렸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인방(隣邦)인 한국과 일본 사이에 적어도 비자라는 장애물은 완전히 사라지는 셈이다. 환영할 일이다.

지난해 한국을 찾은 일본인은 242만 명이고,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은 190만 명이었다. 한류를 타고 밀려드는 일본인 관광객과 일본 방방곡곡의 온천장과 골프장, 스키장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이 상징하듯 양국 간 교류는 개인 중심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질적 변화를 보이고 있다. 또 지난해 3월 일본에서 열린 아이치(愛知) 박람회를 계기로 취한 한시적 단기비자 면제 조치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불법체류자는 극히 미미한 수준에 그쳤다. 일본 정부의 이번 조치는 이런 상황을 종합적으로 반영한 현실적 결정이겠지만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시각이 수평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또한 긍정적이다. 아시아에서 일본이 단기비자를 면제한 나라는 싱가포르.홍콩.대만.마카오.브루나이 등 5곳 뿐이다. 단기비자 면제 항구화 조치로 한.일 간 민간 교류의 폭과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릴 수 있는 획기적 전기가 마련됐다고 본다.

일본 정부가 장기간의 검토 끝에 비자 문제에 대해 용단을 내린 배경에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로 극도로 경색돼 있는 양국 관계를 복원하는 실마리를 찾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도 담겨 있다고 본다. 그 심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민간 차원의 교류와 야스쿠니 신사는 별개의 문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결단이 없는 한 야스쿠니 문제로 인한 양국 관계의 경색은 풀리기 어렵게 돼 있다.

고이즈미 총리가 집착하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서는 일본 내에서도 반대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대표적 보수신문인 요미우리조차 고이즈미 총리의 전향적 자세를 촉구하고 나섰다. 일본의 아시아 외교 실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보수파 지지세력 결집을 위한 정치적 목적 때문이라면 정권은 얻지만 국익을 잃는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할 수 있다. 야스쿠니는 일본의 군국주의적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관한 역사인식의 문제다. 피해 당사자인 우리로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에 봉안돼 있는 A급 전범 14명의 위패를 분사하는 방안이나, 야스쿠니 신사를 대체할 수 있는 국립 추도시설을 건립하는 방안 등 일본 내 양식 있는 세력이 제시하고 있는 건설적 방안을 고이즈미 총리는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일본 정부가 모처럼 용기를 갖고 취한 비자 면제조치가 양국 관계의 경색을 푸는 전기가 될 수 있도록 야스쿠니 문제에 대한 일본 측의 성의 있는 자세를 다시 한번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