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신 8일前 '총선 뒷돈' 추궁

중앙일보

입력

"추가 비자금을 추궁하자 정몽헌 회장은 무척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

'현대 비자금 1백50억원+α' 사건을 맡은 수사 관계자는 지난달 26일 현대아산 고(故) 鄭회장을 소환 조사할 때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현대 비자금이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에게 흘러갔음을 포착한 검찰이 鄭회장을 상대로 이를 추궁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불명확했던 鄭회장의 자살 동기가 어느 정도 윤곽을 잡게 됐다.

실제로 검찰의 한 관계자는 "검찰의 강압 수사가 아니라 추궁 내용이 鄭회장에게 큰 압박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초 특검에서 사건 수사를 넘겨받은 검찰은 수사 착수 20여일 만인 지난달 26일 鄭회장을 극비리에 소환 조사했다. 그동안의 계좌 추적과 현대 핵심 관계자들에 대한 조사에서 鄭회장을 추궁할 만한 단서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특검에서 조사받은 1백50억원의 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 전달 건(件)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던 鄭회장은 검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궁지로 몰렸을 것이다. 측근 인사들의 진술을 토대로 12시간 이상 계속된 집요한 추궁에 鄭회장은 총선 자금 전달 사실을 시인한 것으로 보인다.

대검의 한 관계자는 "결국 이에 대한 자괴감과 무력감.좌절감이 鄭회장 사인의 중요한 원인이 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鄭회장이 자살 직전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에게 남긴 유서에는 "모든 대북 사업을 강력히 추진하기 바란다"면서도 "어리석은 사람이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라고 언급한 부분이 나온다.

鄭회장의 한 측근은 "이 부분이 검찰 소환 조사에서 불가피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른 중압감에 시달렸을 鄭회장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검찰 입장에서도 이번 기회를 '정치 검찰'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한 계기로 삼기 위해 수사에 강한 의지를 보였을 것이다. 검찰은 지난달 26일에 이어 같은 달 31일과 지난 2일에도 鄭회장을 불러 비자금 1백50억원 부분을 보충 조사하는 등 재벌 총수에 대해 이례적으로 집중 조사를 벌였다.

현대그룹의 한 관계자는 "소심한 성격의 鄭회장이 명분이 있는 대북 송금과는 차원이 다른 정치권에 총선 자금 지원이라는 악재를 만나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현대 측이 북한에 보낸 5억달러는 대북 사업 추진 대가 및 통일 비용이라는 명분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총선 자금 제공은 정.경 유착 비리로 비난받을 사안이다.

지난 정부 한 관계자는 "비자금이 權씨 측에 흘러간 2000년 초는 현대그룹 일가의 경영권 승계 다툼인 '왕자의 난'이 벌어졌던 시기"라며 "경영권을 확보하기 위해 鄭회장이 정치권에 로비했을 가능성이 크다"고도 했다. 검찰의 비자금 수사를 통해 이런 '절대 알리고 싶지 않는' 내부 사정이 밝혀지자 죽음을 택했을 것이란 추측이다.

이밖에 대검 수사가 현대그룹 계열사의 분식회계 쪽으로 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했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鄭회장 자신이 2000년부터 대북 송금으로 빠져 나간 돈을 분식회계로 처리하도록 지시한 흔적이 속속 드러나면서 대형 회계조작 사건으로 비화할 것을 우려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조강수 기자pinej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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