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슬픈 죽음의 행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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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가족과 모처럼 조용한 곳으로 휴가를 떠났다. 휴대전화조차 터지지 않는 횡성의 깊은 계곡에 짐을 풀었다.

소탈한 펜션 바로 옆으로 얼음장같이 차가운 계곡물이 흘렀다. 맑디 맑은 물속에 깊숙이 몸을 담그니 뼛속까지 냉기가 밀려와 진저리가 쳐졌다. 잠시 후 내 발 주위로 귀여운 민물고기들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게다가 일급수에만 산다는 가재와 오랜만에 보는 개구리까지….

문득 나는 아이에게 자연학습을 시켜주고 싶은 생각에 잠자리채를 가지고 물고기를 잡기 시작했다. 흥분한 아들녀석은 바위 위를 깡충깡충 뛰어다녔다. 투명한 플라스틱 과자통에 물고기.가재.개구리 등을 모두 잡아넣으니 순식간에 미니 수족관이 만들어졌다. 미끈거리는 물고기를 직접 만져보고 가재도 쿡쿡 찔러보는 아들놈은 신기해 넋이 나간 얼굴이다.

한숨 돌린 나는 펜션 주인이 냇가에 만들어 놓은 탁자에 앉아 모처럼 책 한권을 읽기 시작했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과 숲 속의 새소리를 들으며 책장을 넘기다 보니 '이게 웬 신선놀음인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진정한 휴식의 감정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 멀리 평상 쪽을 바라보니 아이는 미니 수족관을 옆에 둔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모기향이라도 피워줄까 싶어 가보니, 잡아온 십여마리의 민물고기들 중 큰 놈 두 마리가 허연 배를 드러내고 뒤집어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깜짝 놀라 건드려 보니 이미 죽었는지 움직임이 없다. 산소부족 탓이었을까, 아니면 플라스틱 통에서 어떤 독성이라도 녹아 나온 것일까.

깨어난 아이와 함께 허겁지겁 냇가로 달려가 물고기와 가재 등을 전부 풀어주었다. 부처님 오신 날에 하는 방생의 쾌감이 이런 것일까. 불과 몇 시간 전에는 신나게 물고기를 잡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다가, 지금은 또 방생의 쾌감 운운하고 있으니 인간은 참 간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다시금 맑은 물 속으로 신나게 헤엄쳐 사라지는 물고기들을 보니 기분이 상쾌하고 짜릿했다. 그러나 허옇게 뒤집어진 두 마리의 죽은 물고기는 차가운 물속으로 뻣뻣한 시체처럼 가라앉았다. 그 모습이 조금은 섬뜩하게 마음에 걸렸다. 내가 고요한 숲 속의 공기를 음미하며 책장을 넘길 때마다, 이 두 녀석은 플라스틱 통 속에서 서서히 숨이 막혀가며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던 게 아닌가. 왜 굳이 그 시간에 나는 평소에 잘 하지도 않던 책읽기를 하고 폼을 잡았던 것일까.

그러나 이박삼일의 휴가에서 돌아와 밀린 신문들을 훑어보니, 이렇듯 민물고기 두 마리의 죽음에 관해 시시콜콜 얘기를 늘어놓는 것 자체가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신문에는 온통 죽음에 관한, 특히 자살에 관한 뉴스 투성이였기 때문이다.

투신한 재벌 회장, 내무반에서 자살한 사병, 그리고 가장 슬프고 끔찍했던, 고층아파트에서 아이들을 집어던지고 자신도 투신했던 한 여인의 사연에 이르기까지 ….

이런 사연들을 읽다 보면 왠지 내가 한가롭게 휴가를 갔었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럽게 여겨져 마음이 불편해진다. 내가 숲 속에서 고요한 휴가를 즐길 동안 사람들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처절한 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는 것이 새삼 뼈아프다.

플라스틱 통 속에서 죽어간 두 마리의 물고기와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고 고인들에 대한 모욕인 것 같아 두렵기도 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자들의 복잡한 사연과 절박한 마음을 살아있는 우리가 어찌 감히 짐작이나 할까 싶기도 하지만 어찌됐건 슬픈 죽음의 행렬만은 멈춰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러분이 이 글을 읽는 이 순간에도 누군가 어느 곳에서 조용히 죽음을 선택하고 있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봉준호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