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보험의 배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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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나현철
나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나현철 논설위원

나현철 논설위원

1912년 4월 14일 아일랜드 벨파스트를 떠나 미국 뉴욕으로 가던 타이타닉호가 빙산과 부딪쳐 침몰하기 시작했다. 공황상태에 빠진 승객들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승무원들에게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이 소리쳤다. “영국인답게 행동하라(Be British).” 승무원들은 승객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영국 선원의 본분을 떠올렸다. 부족한 구명정을 어린이, 여성, 노인 순으로 채웠다. 결과적으로 1500명 이상이 숨졌지만 배와 운명을 같이하며 수습에 최선을 다한 그의 직업정신은 온 세계의 칭송을 받았다.

타이타닉호가 남긴 전설은 이뿐이 아니다. 침몰 석 달 전 선사 대리인들이 세계 최고의 보험사인 로이드를 찾았다. ‘절대로 가라앉지 않는 배’였지만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한 보험에 들기 위해서였다. 로이드는 7500파운드의 보험료를 받았다. 타이타닉이 침몰하면 140만 파운드를 주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사고가 발생했다. 보험금을 다 주면 로이드가 파산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보험금은 한 달 안에 전액 지급됐다.

17세기 말 투자자 조합으로 시작된 로이드의 모토는 라틴어 피덴시아(Fidentia·신뢰)다. 고객의 위험 대비와 보험사의 생존을 이어주는 게 바로 신뢰라는 의미다. 삼성·한화·교보 등 국내 대형 생명보험사의 모토도 비슷하다. ‘사람, 사랑, 가족, 꿈, 신뢰, 의리’ 같은 말을 내세운다. 최고경영자(CEO)들도 틈날 때마다 “보험의 근간은 상부상조 정신”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지난주 마무리된 자살보험금 사건은 이들에 대한 신뢰에 커다란 물음표를 남겼다. 유족들이 ‘가입 2년 뒤 자살 땐 재해사망 보험금을 지급한다’는 약관대로 보험금을 달라고 하자 “실수였다”며 10년 넘게 보험금을 안 줬다. 법원 소송에선 “다른 보험사 약관을 그대로 베끼다 생긴 일”이라는 창피한 변명을 했다. 지난해 대법원에서 “약관대로 지급하라”고 했는데도 “소멸시효가 지난 건 못 주겠다”고 버텼다. 금융감독원이 사장을 포함한 임원 징계 및 영업정지 카드를 내민 뒤에야 할 수 없이 “모두 주겠다”고 두 손을 들었다.

세계 7위인 겉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신뢰를 스스로 깎아먹었다는 점은 더욱 뼈아프다. 대형 생보사들의 자성이 필요하다. 105년 전 로이드 투자자들이 자살보험금 얘길 들었다면 이렇게 소리쳤을 것 같다. “보험사답게 행동하라(Be a Insurer).”

나현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