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보다 나은 배려심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517호 29면

삶과 믿음

설 명절이 다가오면 마음부터 설랜다. 외갓집에 가면 할머니께서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고 내 새끼들” 하며 마당을 건너질러 마중 나오셨던 풍경이 지금은 전설이 됐다.

“어제가 그날이고 내일이 특별한 날이 아니건만 사람들은 그날그날이 별날인 줄 알고 급급하고 있네.” 도가(道家)에서 하는 일상 이야기다. 나는 원불교에 출가해서 선배들의 이런 말씀을 들으며 세속적인 기름을 빼왔다.

24세 젊은 나이에 가볍게 결정한 출가였지만 나보다 더 일찍 종교의 문을 두드린 사람도 많았다. 이 집에서는 먼저 출가한 사람이 우선이지 나이가 많음이 우선이 아니다. 한마디로 목탁을 먼저 잡은 사람이 우선권이 있다는 말이다.

원불교의 초창기에는 수행하러 집을 떠난 출가자나 가정을 지키며 종교수행을 하는 재가자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다만 구별은 하지만 차별이 없는 이상적인 세상을 꿈꾼 어른이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였음을 지금도 마음속 깊이 새기며 그분의 혜안을 우러러본다.

요즘 세상에서도 구별은 있지만, 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다들 말하고 있다. 같은 장소에서 텔레비전 뉴스를 보는데도 어떤 사람은 “저 봐라 저렇다니까” 하는 사람도 있고 “저건 뉴스가 아니라 자작일 거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서로가 다른데도 우리는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종교인이라고 해서 특별한 음식을 먹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몸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며 특별히 내세울 것도 없다. 오죽하면 『청소부가 된 성자』라는 책이 시중에서 베스트 셀러가 됐을까. 다만 우리가 지향하는 마음의 이야기 즉, 착한 마음으로 사람들과 근심을 나누고 같이 슬퍼하는 일밖에 없는 것이다. 개인 수행은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 일종의 마음의 머묾에 대한 깨달음이다. 젊은이들 다수는 종교라는 말만 꺼내도 가볍게 손사래를 친다. 고리타분하다는 것이다.

며칠 전에 딸아이가 비행기 표를 몇 장 준비해 일본 홋카이도를 다녀왔다. 눈 덮인 동토의 땅에 바람과 흰 눈이 전부인데 그것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세상의 복잡한 시야도 일시적으로 다 덮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하고 자문해봤다.

그날 호텔에서 나와 아침 식사를 하려고 조심조심 길을 나서는데 길 모퉁이에서 어떤 할머니가 비상용 간물대에서 작은 돌가루 봉지를 꺼내 눈과 얼음으로 미끄러운 새벽길에 조금씩 뿌리고 있었다. 순간 “이일을 왜 하시나요”하고 여쭈니 “사람들이 아침 출근길에 미끄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라고 했다. 배려하는 마음이 깨달음보다 낫다.

정은광 교무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