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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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오랜만에 엄청난 인파를 보았다. 지난 4반세기중엔 없었던 일이다. 『이한열군은 오늘로써 다시 태어났다 는 말이 실감날 정도다.
장강대하를 이룬 그 인파를 보며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했을지 궁금하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왜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을까. 단순한 추도인파일까.
물론 이군의 죽음은 더없이 애석한 일이지만 그것이 전부의 이유는 아닐것 같다.
사람들은 그동안 너무 기를 못펴놨다. 하다못해 선술집에서 시국담간을 할 때도 전후좌우로 두리번거려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먼옛날 얘기가 아니다.
시정의 다방에서 섣불리 입바른 소리를 하다가 신고를 당해 연행되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택시를 타도 마음놓고 말을 건넬수 없었다. 신고하는 사람이나 신고를 받는 사람도 사람이지만, 『상감 없는 자리에선 상감 흉도 본다』는 세정과는 너무도 판이한 현실이었다. 그런 세상을 벌써 몇년을 살아왔는가.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데모라면 뿌리를 빼려고 덤빈 원천봉쇄 작전이다. 한 둘도 아니고 4천수백만명이 어우러 사는 곳에 어떻게 일사부난만 있을수 있겠는가. 몇 안되는 가정에서도 부부, 형제간에 뜻이 안맞아 때로는 큰 소리가 밖으로 삐져 나온다.
그것은 각기 다른 자존심과 인격을 가진 사람들의 사회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고 인간다운 일이다. 그런 사람들이 개미나 두더지같이 살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선 권력 집단과 의견이 다른 것이 대역죄로 다스려지고, 열명만 모여 쑥덕거리고 소리가 커져도 투구를 쓴 전경이 달러들고 최루탄이다, 사과탄이다, 지랄탄이다 하는 요상한 것들을 던졌다.
어디 그뿐인가. 목을 누르고 팔을 비틀고 엉덩이를 차는 일이 예사로 벌어졌다.
9일의 인파는 모처럼 민주화의 훈풍이 불고 「민주학생」의 장례식도 벌어지는 마당에 그동안 기를 못펴던 걺은이, 시민들이 쏟아져 나와 가슴을 풀고 심호흡을 하고 호기를 뿜어본 것이다.
그 인파가 밀물을 이룬 것이다. 이들은 난중도, 우중도 아니다.
우리의 이웃이고, 길에서 언제나 만날수 있는 보통 사람들이다.
서울시청 광장을 메운 이들은 크게 빗나가는 일없이 행진을 끝냈다. 썰물처럼 모두 빠져나갔다. 더러는 과격행동을 시도했지만『질서, 질서!』를 외치는 소리가 우렁찼다.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제 민주시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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