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을 식히고 대화를 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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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온 나라가 「무거운 여름날의 시위」로 진통을 겪고 있다. 지난 10일 이후 정치는 완전히 거리의 정치로 바뀌고 그 정치의 자리엔 학생들의 격렬 구호로 가득 차 있다. 소위 말하는 제도권은 제도권 외에 밀려 그 기능의 회복이 여전히 오리무중이 되어 있다.
고대했던 영수회담도 한쪽에선 벌써부터「결렬」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전부가 아니면 무라는 정치의 패턴이 아직도 우리 정치의 본유를 이루고 있다. 스스로의 말에 의해 스스로 제약당하고, 스스로의 조건에 의해 스스로의 운신이 좁혀지는 그 정치행위가 여전히 우리 정치인들의 기본행위 유형이 되어 있다.
6·24 영수회담에서 거론된 개헌논의 재개가 바로 4·13조치의 철회나 다름없다면, 그것을 시작으로 어째서 정치가 다시 전개되어 가지 못하는가. 어디서든 대화의 실마리가 잡혔다면 왜 그 실마리에서 부터 말을 엮어가지 못하는가.
매듭을 풀어가는 정치-그것이 바로 정치의 원형이다. 어디서든 매듭을 푸는데서 정치는 시작되고 그 매듭을 엮어버리는데서 정치는 끝이 난다. 그런데 왜 그 매듭을 푸는 실마리를 잡고서도 우리의 정치는 여전히 시작이 이루어지지 않는가.
욕심이 현실을 앞지르고 감정이 이성의 복귀를 저지하고있기 때문인가. 우선 사람의「만남」자체가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던 우리 정치현실에서 그 만남이 이루어졌다면 만남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수확인가. 적대국 사람과의 만남처럼 만남 그 자체가 그토록 어려웠던 우리정치의 장에서 그 만남이 현실로 나타났다면 그것이 바로 정치의 시작이 아닌가. 그 만남 자체가 바로 대립의 관계가 대화의 장으로, 단절의 관계가 화해의 장으로 옮겨간다는 전조가 될수도 있지 않은가.
정치는 만남의 광장이다. 그 어떤 대화든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그 누구든 얼굴을 맞대는데서 말은 열리고 말이 열리는데서 이해가 시작된다.
만남이 없는 정치는 정치의 종말이다. 대화가 없는 정치는 정치의 죽음이다. 서로간 이해가 없는 정치는 정치의 파괴다. 이 모든 정치의 부정들이 만남에서 공정으로 바뀌어 간다면 지금 우리의 정치는 그 긍정의 발판인 만남을 시작하지 않았는가.
이 영수들의 만남을 시작으로 다시 국회를 열고 다시 대화를 트고 다시 개헌이라는 작업을 시작해야 하지 않겠는가. 처음부터 이러저러한 요구가 충족되지 않았으니 이 만남은 결렬이다, 이 문제가 해결될 가망이 없으니 이 만남은 있으나 마다식의 정치는 정치가아니다. 미리 내세운 선행조건에 의해서 다음 행위의 범위를 극소화시키는 행위는 가장 미발달한 정치적 행위다.
정치의 대화는 단계를 하나씩 하나씩 올라가는 층계와 같다. 그 누구든 다섯계단, 열계단을 한꺼번에 넘어갈 수는 없다. 대화에서 단계의 비약은 금물이다. 결론부터 내고 시작하는 대화는 할 필요가 없는 대화다. 이미 결론이 나 있는 것을 하는 대화도 대화가 아니라 도노다. 그 어떤 대화든 점진적이어야 한다. 점진적이 아닌 대화는 말의 맥을 스스로 끊고 말의 통로를 스스로 차단하는 대화가 된다.
선택적 국민투표든, 직선제 개헌이든 당사자들이 다시 모여 대화를 점진적으로 이루어가는데서 달성될수 있다. 처음부터 안된다는 것을 전제하는 정치는 정치가 이미 정치됨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어떤 정치든 정치는「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어떤 난관이든 뚫린다는 확신이 성숙한 정치인의 자세다.
성숙한 정치인의 자세 속에는 승리에 대한 확신 역시 강하게 도사려 있다. 패배를 전제하는 정치는 어김없이 실패하는 정치가 된다. 가장 절망 속에서도 승리를 노리는 것이 정치의 정도다.
우리 경제가 그 많은 시위로 이미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느니, 88올림픽 개최가 불투명하다느니 하는 국가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차대한 대사들이 집권에 혈안이 돼있는 정치인들에겐 귓바퀴 넘어 들릴지도 모른다.「민주화」가 되지 않는 상황에선 모든 것이 무가치한 것으로 일축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정치인들도 정치는 승리를 노리는 것이라는 데에는 일치한다.
그러나 그 승리는 적어도 정치의 세계에 관한한 경제의 세계와는 달리 제로 섬 게임은 아니다. 그 승리는 주는 것만큼 받는데서 이루어지는 승리다. 주기만 하고 받지 못하는 정치는 패배의 정치다. 받기만 하고 주지 못하는 정치 역시 지는 정치다. 정치는 주고 받음의 공동의 광장이다. 그 공동의 광장에서 승리는 공동의 승리다. 여도 이기고 야도 이기는 정치-여야 공동의 승리가 정치의 본령이다.
우리 정치는 이제 최소한「만남」의 광장은 이루어졌다. 비빌 언덕이 없던 우리 정치에 여야 영수회담은 적어도 여든 야든 기댈수 있는 언덕은 된다. 우리 정치인들이 이 언덕을 최대한 활용하지 못하면 우리 정치는 정치인들의 손에서 미상불 떠나게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광란의 시대로 접어들지 모른다. 60년대 구미에서 보던 그 무거운 여름날의 폭동이 정치의 계절을 완전히 대체해 버릴지도 모른다.
모두가 다 미쳐서 날뛰는-광란의 거리, 광란의 학교, 광란의 성당, 광란의 경찰, 광란의 정부, 그리고 무수한 상처를 입고난 뒤 비로소 이성의 리얼리즘으로 되돌아가는 회귀하는 정치사의 깊은 수렁에 우리는 또다시 빠질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열을 식히고 냉정한 가슴으로 대화를 열자. 우리 모두 자제하고 억제하고, 그리고 이성으로 되돌아 서로에게 승리감을 안겨주는 정치로 지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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