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있는 에세이|시인의 전화 이경식<서울서대문구현저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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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며칠전 어느 시인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시인은 얼마전에 라디오방송을 통해 한 전신마비 청년이 입으로 펜을 물고 써 내려간 수기가 소개되는 것을 듣고 감격했었다고 했다.
그 수기를 쓴 전신마비 청년은 전화상으로 나와 친교를 맺고 있는 지인이었는데, 그가 시인에게 나를 소개했던 모양이었다. 나 또한 척추를 다친 문학청년이라는 사실과 함께.
시인은 나에게 따뜻하고 힘찬 말들을 들려주면서 자신이 펴낸 시집을 한권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오래전 척추를 다쳐 방안에만 갇혀 있으면서 혼자 공부를 하고, 혼자 시를 끄적거려 오던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책을 구입할만한 여유도, 시간도 없는 나로서는 내가 써온 시들이 어느정도의 수준인지 알지 못했다. 비교해 볼만한 시집 한권조차 나에겐 없었으므로.
시인의 시집이 나에게 배달될 때까지 나는 마음을 졸이며 지냈다. 그것은 어쩌면 내 짧은 생애중 가장 길고 신비로운 기다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집을 받았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그 때의 감격 때문에 잠시 호흡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다.
다치기 전 먼 유년시절. 아버님의 서재에서 함부로 책들을 끄집어내 철 모르고 친구들에게 나눠주던 기억이 그때 떠올랐다. 아버님 서재 가득 꽂혀 있던 수많은 책들은 그러나 내 손 안에 쥐어진 시인의 시집 한권에 결코 비할바가 못되었다.
나는 오늘도 이 시집을 읽는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손끝을 타고 이상한 힘들이 전해진다.고마운 시인이여, 감사드린다. 그리고 시인을 알게해준 친구에게 감사드린다.
『우리, 쓰러지지 말자. 쓰러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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