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문화가 국가경쟁력 높여…이젠 입보다 귀를 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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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세 명이 한 조를 이뤘다. 각 조에 A4 용지 한 장씩을 나눠줬다. 종이를 3분등해 접고 한 명은 동물의 머리를, 나머지 둘은 각각 몸통과 꼬리를 그리게 했다. 다만 조건이 있다. 첫째, 서로 말을 하거나 의논을 하면 안 된다. 둘째, 머리나 몸통 부분을 그린 사람은 다음 사람에게 그림의 3분의 1만 보여준다. 결과는 다양했다. 토끼 머리에 말 몸통, 돼지 머리에 호랑이 꼬리 등 각양각색이다. 머리·몸통· 꼬리가 일치한 경우는 드물었다. 참가자들은 그림을 보며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사회 지도층부터 경청문화를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조성택(왼쪽) 고려대 교수. [사진 함께하는경청]

“사회 지도층부터 경청문화를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조성택(왼쪽) 고려대 교수. [사진 함께하는경청]

지난 1일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에 위치한 제빵기기업체 대흥소프트밀(대표 김대인) 강당 풍경이다. 이날 강사로 참여한 박수선(한국갈등학회 교육위원회위원장)씨가 또 다른 실습을 진행했다. 이번에 두 명이 짝꿍이 됐다. 그들에게 색종이를 나눠주고 서로 등을 맞대게 했다. 한 명이 색종이로 만들 모양을 순서대로 말하면, 나머지 한 명이 실제 모양을 만들어갔다. 역시 결과는 기대 밖이었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몸과 마음을 맞추기는 쉽지 않았다.

‘함께하는경청’ 기업 탐방 현장
직급 높을수록 경청지수 낮아
“내가 듣고 보는 건 전체의 일부
타인 배려하는 듣는 훈련 필요”

박씨가 참가자들에게 말했다. “내가 듣는 것, 보는 것은 전체의 일부입니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죠. 내가 보는 게 다가 아닙니다. 그래도 갈등을 줄이려면 우선 듣는 수밖에 없어요. 듣는 것도 연습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날 행사는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열렸다. 자기의 몸과 마음을 낮춰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 즉 경청(傾聽)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2005년 대화문화아카데미·화쟁문화아카데미·한국리서치·중앙일보 네 곳이 뜻을 모은 ‘함께하는경청’(이사장 정성헌)이 기업체 현장을 찾아 경청의 의미를 새겼다. 특히 ‘함께하는경청’이 올 6월 한국언론학회와 공동으로 개발한 경청진단지수를 처음 적용한 자리였다. 대흥소프트밀 임직원 75명을 대상으로 회사 내부의 경청문화와 업무 만족도 등을 진단했다.

조사 결과는 한국리서치 김춘석 이사가 발표했다. 직급별 차이가 눈에 띄었다. ‘나와 다른 의견을 인정하는 편이다’라는 항목에 부장 이상은 68%가 ‘그렇다’고 했지만 일반 직원은 82%가 긍정적으로 답변했다. 직급이 높을수록 경청지수가 낮았다. 반면 경청과 업무 효율성의 상관관계는 높았다. 1점 만점에 0.864로 나타났다. 김 이사는 “2년 전 조사에서 국민의 91%가 경청문화가 필요하다고 응답했다”며 “경청은 회사는 물론 정치, 나아가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데 필수적”이라고 설명했다.

‘함께하는경청’은 우리 사회의 갈등과 다툼을 경청문화 확산으로 풀어가자는 뜻에서 출범했다. 타인을 배려·수용하는 인문정신의 기본 조건으로 경청과 대화를 꼽았다. 이날 특강에 나선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는 경청을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비유했다. 내가 만진 것도, 남이 만진 것도 모두 코끼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조 교수는 “한국 사회의 숱한 균열과 충돌을 줄이려면 입보다 귀를 먼저 여는 자세가 요청된다”며 “각자 다른 생각으로 평화롭게 다투는 신라 원효 대사의 화쟁(和諍) 사상이 바로 이 시대 경청과 통한다”고 말했다. 주최 측은 단체·기업·지자체 등으로 활동영역을 계속 넓혀갈 계획이다. 연락처 admin@kyungchung.org, 070-8873-2023.

박정호 문화전문기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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