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피해 합의금, 조목조목 따져 받게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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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주부 A씨는 차를 타고 교차로 정지신호에 대기하던 중 뒤차에서 추돌 사고를 당해 병원에 20일간 입원을 했다. 가해차량의 보험사는 “합리적으로 계산했다”며 A씨에게 합의금 800만원이 적힌 합의서에 서명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A씨는 “세부내용을 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보험사는 “규정상 근거가 없다”며 거부했다.

보험사가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돈
내년 3월부터 항목별 지급액 표시

내년 3월부터는 이처럼 교통사고 피해자에게 합의금 총액만을 알려주던 ‘깜깜이 합의서’가 사라진다. 보험사가 항목별 지급 여부를 합의서에 표시한 뒤 항목별 금액을 피해자에게 구두로 설명하도록 합의서 양식을 개선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은 5일 이런 내용의 ‘자동차보험 대인배상보험금 지급 투명성 제고 방안’을 마련했다.

이에 따르면 자동차사고가 나면 가해자 측 보험사는 피해자에게 보험금을 3종류(차량수리비·치료비·합의금)로 나눠 지급한다. 차량수리비(대물배상보험금)는 보험사가 정비업소에, 치료비는 보험사가 병원에 직접 지급한다. 이와는 달리 합의금은 보험사가 피해자에게 전달하는 돈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피해자가 보험사로부터 합의금 총액만을 전달받기 때문에 합의금이 제대로 산정됐는지 알 수 없다는 지적이 많았다. 일부 지급항목이 누락되더라도 피해자가 이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금감원은 이런 맹점을 보완하기 위해 내년 3월부터 보험금 종류와 세부 지급 내역을 표시하도록 한 새 합의서 양식을 도입하기로 했다. 피해자는 세부 내역이 담긴 합의서를 살펴본 뒤 합의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부상 합의금의 경우 ▶위자료(15만~200만원) ▶휴업손해(수입감소액의 80%) ▶손해배상금(병원 진단기간 이후 예상 치료비 등) 등이 포함돼 있다. 앞서 소개한 A씨(병원 20일 입원)의 사례를 예로 들면 보험사는 위자료(25만원)·휴업손해(110만원)·손해배상금(665만원) 같은 세부항목의 지급 여부를 합의서에 표시해야 한다. 다만 금액은 합의서에 표시하지 않고 구두로 설명한다. 향후 치료비 증가로 손해배상금이 예상보다 많이 나올 경우 총액을 맞추기 위해 위자료를 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병원으로부터 진단기간 내 치료비 내역도 통지받는다. 치료비 총액만 알려주는 현 제도에서는 피해자가 어떤 치료를 어느 정도 비용으로 받았는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부 병원에서는 이를 악용해 치료비를 고의로 부풀려 청구하는 ‘도덕적 해이’도 나타나고 있다. 가해자도 보험사로부터 피해자의 상해등급과 보험료 할증점수를 서면으로 통지받게 된다. 상해등급에 따라 부과되는 할증점수(1~4점)에 따라 보험료 할증폭이 결정된다는 점을 감안한 조치다. 현재 가해자는 보험사로부터 피해자에게 지급한 보험금 총액만을 통지받고 있다. 이로 인해 가해자는 자신의 자동차 보험료가 얼마나 오를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앞으로 할증점수를 통지받으면 가해자가 보험료 할증폭을 미리 가늠할 수 있다.

김일태 금감원 특수보험팀장은 “교통사고를 당한 뒤에 보험회사와 합의할 때는 세부 지급 항목별로 누락된 내용이 있는지 꼼꼼히 확인해달라”고 당부했다. 김 팀장은 “일단 합의서에 서명하면 재합의가 쉽지 않다”며 “재합의는 합의 시점에 예견하지 못한 피해자의 후유장애 등이 차후에 생길 경우에만 요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태경 기자 uni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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