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北에서 보던 산하 南에서 걷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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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휴전선 북쪽에서 경계 근무를 서며 바라보던 풍경을 이번에는 남측에서 볼 생각을 하니 만감이 교차하네요. 조국의 분단을 저만큼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탈북자 출신으로 현재 연세대 인문사회계열 1학년에 재학 중인 탁은혁(22)씨. 그는 휴전선 도보 횡단 행사 참가를 앞둔 심정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卓씨는 한국 스카우트연맹이 '평화 한마음, 통일 한마음, 철마를 달리게 하자'라는 주제로 오는 8일부터 주최하는 '2003 휴전선 1백55마일 횡단 체험' 행사에 참가한다. 국내 중.고.대학생 1백33명이 참가, 5박6일간 열리는 이번 행사는 임진각을 출발해 철원.김화.화천.양구 등 한국전쟁의 격전지를 거쳐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대장정이다.

꼬박 4백15㎞를 한땀한땀 걸어야 하는 여정이다.

卓씨에게 이번 행사가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인민군으로 복무 중 지난해 2월 귀순한 그가 귀순 직전까지 근무했던 곳이 바로 휴전선에 맞닿아 있는 도라산역 부근 초소였기 때문. 16세 때 입대해 6년간의 군생활 대부분을 휴전선 부근에서 근무했던 卓씨의 마지막 보직은 대남방송 담당 조장이었다.

"북측에서 근무할 때는 '휴전선을 잘 지키는 것이 통일을 앞당기는 길이다'라고 생각했어요. 또 미군을 몰아내야 통일이 앞당겨진다는 대남방송도 했었지요. 하지만 남측에서 살아보니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휴전선은 통일을 위한 교두보가 아니라 통일을 막는 원흉일 뿐입니다."

이번 행사가 卓씨에게 특별한 이유는 또 있다. 최근 탈북자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중국 등 제3국을 통한 가족단위 탈북자와는 달리 군복무 중 혈혈단신 귀순한 卓씨이기에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다른 탈북자들에 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일요일이면 임진각이나 도라산 전망대를 찾곤 했어요. 북에 계신 부모님과 동생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언젠가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휴전선을 종주해봐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서야 그 꿈을 이루게 됐네요."

그리움과 함께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염원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기는 것 외에 卓씨가 이번 행사에 참가해 얻고 싶은 것은 또 있다. 바로 조국의 현실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는 '남한 친구'를 사귀는 것.

"또래 남측 대학생들이 통일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심지어 '통일이 되면 귀찮을 것 같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는 것을 보면서 실망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휴전선을 같이 걷게 될 친구들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그래서 그는 "함께 통일을 위해 힘쓸 친구들을 많이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남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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