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엔 민주화 야엔 타협 강조|미 정부관리들, 여야정치인들과 왜 연쇄접촉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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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개헌정국의 타결 실마리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최근 미국 측의 대한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한국 문제에 대한 미국정부· 의회의 대한발언이 잦아지고 있고 주한 미대사와 국무성 간부들의 야권정치인들과의 접촉도 빈번해지고 있다.
이런 접촉에 있어 미측은 극히 신중한 방법을 택하고 있지만 그들의 대한 관심의 농도는 진하고 대화범위는 깊숙한 곳까지 미치고 있는 것 같다.
작년 11월 정국이 매우 긴박한 분위기일 때 국무성의 「시거」 차관보와 「클라크」부차관보가 다녀갔고, 이어 「에이브러모위츠」 차관보가 왔는가 하면 금년 들어서도「글라이스틴」전 대사와 국무성의 「블레이그 모어」 한국과장이 다녀갔다. 또 3월6일에는 「시거」 차관보를 대동하고 「슐츠」 국무장관이 방한 할 예정이어서 벌써부터 그의 4시간 체한예정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부임 3개월 동안 여야정치인들과 꾸준히 만나온「릴리」 주한미대사의 정치인 접촉이 본격화하고 있다. 9일 이민우 신민당 총재와 만난데 이어 10일에는 김영삼 고문을 잇달아 만났으며 앞으로도 야권 인사접촉은 계속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릴리」대사와의 면담내용에 대해서 김고문이나 이총재 측 모두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고 있다.
이총재와의 면담에 배석했던 한 인사는 『의례적인 것일 뿐이며 유일한 성과라면 빠른 시일 안에 다시 만나기로 한 것 정도』라고 만 말했다.『화제는 「릴리」대사가 년초 이총재로부터 받은 계란 1백50개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는 등 주로 신변잡사에 관한 것』이 었다는 것.
그러나 실제로 이날 오찬대화는 비록 가벼운 분위기속에서 진행됐지만 개헌문제 전반에 걸친 타협과 절충의 가능성에 대한 미 측의「시험적 타진」 이었다는 인상이 짙다.
분위기는 가벼웠지만 지극히 중대한 의미를 띤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몇 가지「방안」 이 언급됐기 때문이다.
「릴리」 대사가 이총재에게 시종일관 강조한 것은 「타협」이었다는 것.
어떤 형식, 어떤 방향의 타협인지에 대해 미 측이 구체적으로 손에 쥐어주듯 언급한 것은 없었지만 적어도 미 측의 의중이 무엇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감지할 수 있는 표현들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측으로서는「이민우 구상」으로 나타났었던 이른바 선민주화론에 대해 여전히 큰 관심을 보였던 것 같다.
이총재 측이 특히 관심을 표했던 부분은 최근 「시거」차관보가 뉴욕연설에서 여야가 다같이 내놓아야 한다고 역설한 「혁신적 방안」의 내용에 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미 측은 역시 구체적인 언급은 없이 다만 야당이 수용할 수 있는 「타협적 절충안」과 그러한 절충안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명분 및 과정에 대해 관심을 표하는 ,우회적인 암시정도를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릴리」 대사 측은 그러한 「절충안」 에 대한 타협이 이뤄지기 위한 전제로서 정부·여당 측이 취해야할 방안 등에 관해서도 언급이 있었던 것 같고 그 가운데는 공정한 선거제도의 실현 등도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김영삼 고문과의 요담에서도 비슷한 의견타진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김 고문은 회동 후『<합법개헌은 이제 어려워졌다는 느낌』이라고 했는데 「릴리」대사의 어떤 발언에서 그와 같은 인상을 받게됐는지 주목되는 일이다.
「릴리」 대사의 이 같은 대야타진이 어느 범위까지 계속될지도 관심거리다. 특히 그가 정부· 여당이 기피하고 있는 김대중씨와 만날 경우 그 시기와 면담의 형식이 정가에 던질 파문은 의미심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부임 전 미국에서 두 김씨와 만나겠다는 얘기를 했었고 야권에서도 김대중씨와의 면담이 오는 3월 「슐츠」 국무장관의 방한 전에 이뤄질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있으나 아직 확인은 되지 않는 상태다.
○… 「릴리」 대사가 여야정치인들과 만나 대화한 내용이나 그동안 한국을 방문했던 미정부 인사들의 발언을 보면 미 측의 입장은 일관된 흐름을 가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정국이 중대조치세로 잔뜩 긴장하고 있을 때 다녀간 「시거」 차관보·클라크 부차관보나 지난1월말 다녀간 「블레이크 모어」한국과장의 방한동정을 보면 확실히 그렇다.
「블레이크 모어」 과장은 지난달 말부터 1주일여 체류하면서 정부·여당의 인사들을 광범하게 만났고 이만섭 국민당총재, 신민당의 최형우· 양정직 부총재 등 야권인사와도 연쇄접촉을 했었다.
그의 가장 큰 관심은 『난국타개의 묘수가 무엇이냐』는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는 야권인사들에게 『어떤 명분을 주면 그나마 합법개헌이라도 가능하겠느냐』 『개헌이 안 돼 현행 헌법으로 가기보다는 내각책임제로 타협하는 것도 방법이 아니냐』는 등 끈끈한 질문을 던졌다는 것이 그를 만난 사람들의 전언이다.
그 역시 「타협」을 권고했고 그 같은 타협의 전제로서 선거법 협상 같은 것이 가능 하겠느냐의 여부를 타진했었던 것으로 알러져 있다.
여권인사들은 그와의 접촉내용에 대해 모두 함구로 일관하고 있으나 야당가에는「블레이크모어」 과장이 ▲시끄럽지 않은 개헌▲구속자 석방 및 사면·복권 등 민주화조치▲박종철군 사건에 대한 납득할 만한 조치 등에 주로 관심을 보인 것으로 소문이 나있다.
그리고 그가 가장 깊은 관심을 보였던 것은 사실 차기 후계자였다는 말도 들린다.
「블레이크모어」 과장은 그가 다시 한국을 방문할 예정임을 밝히면서 다시 방한할 때까지 상당한 조치가 취해지길 희망한 것으로도 전해지고 있다.
이와는 조금 다른 케이스이긴 하지만 「글라이스틴」 전대사의 방한도 비슷한 시기에 이뤄졌고 그의 역할은 좀더 독특했던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글라이스틴」 전대사는 신분상의 어색함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체류하는 동안 대학신문의 편집국장단에서부터 학계인사들까지 상당히 폭넓게 만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특히 김대중씨의 신상과 관련, 매우 고무적인 발언을 했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김씨측 분위기가 상당히 고양되기도 했었다.
김씨문제는「릴리」대사의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과의 장시간 요담에서도 이와 관련되는 논의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이 나돌았으며, 최근 야당가에는 김씨의 사면·복권을 연계시킨 절충의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 소문이 돌고있다.
○…결국 미측의 입장은 정부·여당에는 보다 과감한 민주화 조치를, 야권에는 타협을 촉구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아볼 수 있다.
미측이 야당에 타진하고있는 타협방안이 선거법협상·민주화조치들인데 이 바람에 한때 「이민우 구상」의 발상지가 미측이라는 추측이 야당가에 그럴싸하게 나돌기까지 했던 것이다.
「릴리」 대사가 제시한 「타협적 절충안」이나, 「시거」차관보의 「혁신적 방법」이 구체적인 대안의 모양을 갖추고 던져지지는 않았지만「절충형」의 논의 가능성이 타진된 듯한 인상이 있다.
야당 측에서는 미 측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유리하게 해석하고 기대하는 분위기도 있고 『결국 우리더러 양보하라는 얘기가 아니냐』 는 지적도 있다.
다만 여권에 대한 미측의 기대가 실현되는 경우 구속자 석방과 같은 조치의 실현은 예상할 수가 있다는 데는 공통이다.
여권으로서도 미측의 움직임은 부담스럽기도 하고 바람직하기도 한 양면성이 있는 것 같다.
아뭏든 미측으로서는 그들의 안보· 경제이익이 손상되지 않도록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는 범위 안에서 개헌정국의 교착상태가 타결될 것을 강력하게 희망하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들은 더욱 반미적인 감정이 확산되지 않는 방향으로의 문제해결을 바라고 있을 것도 분명하다.
미 측으로서는 오는 3욀6일 「슐츠」 국무장관의 방한 때를 한국문제 해결의 하나의 고비로 보는 게 아닌가하는 느낌을 준다. 「슐츠」국무장관의 체한 시간이 고작 4시간이라고 해도 그전에 긴 준비와 절충기간이 있을 것이고 그와 관련되는 가시적 조치들도 나타날 것이 라는 게 야당가의 기대이기도 하다. <이재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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