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 「민주화 데모」의 정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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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요즘 중공 각지에서 정치적 민주화를 요구하는 데모가 자주 일어나고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패트릭·헨리」의 극단적인 구호까지 대학가에 대자보로 나붙고 있다는 뉴스에 어리둥절한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가 중공 당 기관지 인민일보까지 지난 8월30일 백성은 누구나 정치를 논할 수 있다는 논설을 1면 머리에 싣더니 12월15일에는 보통선거, 민주주의, 자유 같은 개념은 인간의 필요성을 반영하는 것일 뿐 부르좌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학생들의 구호나 인민일보의 논설은 분명히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모택동 사상의 도그마에 대한 도전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데모 학생이나 시민이 구속됐다거나 인민일보가 당 중앙으로부터 호된 문책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문제의 열쇠는 여기 있는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해버리면 등소평을 정점으로 하는 이 나라의 실용주의 노선을 걷는 지도층이 학생들의 정치적 민주화 요구, 인민일보의 자유주의 논조를 뒤에서 부추기거나 묵인하고 있는 게 아닌가싶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해 보인다. 실용주의적인 주자파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중공은 내년부터 경제체제를 대폭 개혁한다. 두말할 것 없이 그 개혁이란 자본주의의 시장원리를 도입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직도 기회 있을때마다 고개를 드는 좌파의 거센 반발이 일게 마련이다.
「마르크스」·「레닌」·모택동 노선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좌파의 저항을 견제하기 위해서 주자파는 민주화 없이는 효과적인 경제개혁이 있을 수 없다는 명분을 학생·시민·당 기관지를 통해서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 개혁의 내용을 보면 기업경영에 정부는 개입하지 않고 공장장에게 개인사업부제 형식으로 책임을 지운다. 공개모집으로 뽑은 공장장은 정부와 합의하여 계약한 목표를 초과 달성하면 봉급이 오르고 목표미달이면 감봉이다.
기업의 자주권은 최대로 확대되고, 손익의 자기부담 원칙을 철저히 지키고, 대형과 신설기업들은 주식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한다. 서비스 분야와 영세기업은 정부가 개인이나 단체에 리스 하여 리스료만 받는다.
한마디로 국유의 틀 안에서 자본주의적 경영방식을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선 경제발전의 전제로 민주화가 강조되고 있는데 호의적인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중공의 경제개혁에는 서방 세계의 자본과 기술도입이 필요 불가결하여 중공과 서방의 교류가 한층 확대되리라는데 기대를 걸어본다.
중공이 실용주의 노선에 따라 경제운용에 자본주의 방식을 도입하고, 그 결과 상당한 경제발전을 이룩한다고 해도 그 나라가 공산당 독재하의 사회주의 국가라는데는 변함이 있을 수 없다는데 유의하면서도 소위 수렴 이론에 따라 중공과 서방세계가 냉전적 사고의 틀을 벗고 상호 접근, 공존체제를 강화할 가능성은 배제하지 못한다.
벌써 베트남에서도 자본주의 방식을 도입한 경제개혁의 방침이 선 것처럼 중공의 정치적 민주화 구호와 실용주의적 경제개혁 바람이 서풍을 타고 북한의 굳게 닫힌 문을 여는데 다소라도 기여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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