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필름의 재 방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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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내년도 예산안도 지난해와 똑같은 모양으로 2일 새벽 국회를 변칙 통과했다.
뻔질 난 여야 총무접촉은 끝내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준비운동 격인 국회 의장의 사회석 진입시도를 거쳐 민정당 의원실로 장소를 옮겨 여당 단독의 변칙처리로 마무리 지었다.
의장 석 점거·고함·욕설·멱살잡이.
무대가 바뀌면서 여당 의원들만 몰래 모여 숨을 죽인 가운데 급하게 두드려대는 방망이 소리. 뒤 이어 있은 야당의원들의 질주, 문짝 발길질, 회의장 진입과 여야의원들이 한데 뒤엉켜 연출하는 몸 싸움판-.
묵은 필름을 재방하는 것인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일부 주연들의 얼굴과 무대 등이 다소 바뀌긴 했으나 술취한 의원의 혀 꼬부라진 고함소리와 악에 받쳐 외쳐대는 『×××들아』라는 대사까지 각본에라도 쓰여있듯 어쩌면 그리도 똑같은지….
12월2일. 1년전 그날을 택해 또 하나 추가한 예산 파동기록.
여야 대표간 마지막 절충에 더해 『서울대회 장소 사용을 보장하라』는 신민당 측 추가 조건이나 『말도 꺼내지 말라』는 민정당 측 주장이나 국가재정과 국민부담을 그런 모양으로 변칙 처리하는 결과를 낳은 명분으로 연결시키기에는 너무나도 공허하다. 민정당은 대화와 절충으로 정국을 풀어보겠다는 의지가 부족했고, 신민당 측은 애초에 풀 수 없는 난제를 던진게 아니냐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결과적으로 민정당 측은 미리 설정해 둔 변칙처리라는 방식에 너무나 손쉽고 익숙하게 의지해버린 셈이 됐고 신민당 측은 민정당에 또 하나의 변칙 처리를 낙인찍으려고 몰아간 인상이 역력하다.
국정을 모양 있게 풀어가기 보다는 상대가 무리를 하게 함으로써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게 임의 논리에만 급급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변칙」을 밥먹듯 하는 여당이나, 여당을 「변칙」으로 몰고 가는 야당이나 이미 정치력을 상실하기는 매 한가지다. 정치력을 상실한 정당이란 짠맛을 잃은 소금 같아서 무의미한 정도가 아니라 귀찮은 존재로 인식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여야의 대오각성과 새 출발을 기대해 본다. 【허남진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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