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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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유명한 안시성은 지금의 대련 북쪽에 있었던 고구려의 한 성곽이다. 그 안시성을 향해 당태종의 정예군 30만명이 물밀듯 쳐들어 왔다. 서기 645년(보장왕 4년) 4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성주 양만춘이 이끄는 10만명의 고구려군사는 60여일간의 사투 끝에 당군을 물리쳤다. 이때 당태종은 양만춘이 쏜 화살에 왼쪽 눈을 잃었다고 전한다. 다만 정사엔 패퇴하고 『돌아가는 길에 종기를 앓아 가마(보련)를 탔으며, 태자가 그 종기를 빨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모두 중국 쪽의 기록이다.
안시성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당시 중원을 석권하던 당의 콧대를 꺾고 남진을 억제한 주인공은 고구려의 명장 연개소문이었다. 그는 북벌보다 한반도의 신라·백제를 공략하려는 27대 영유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내세운 뒤 대막리지(지금의 국무총리)란 직위에 올라 대련과 부여를 잇는 천리장성을 쌓아 국방을 튼튼히 한 인물이기도 하다.
『구당서』를 보면 연개소문은 『수염이 길고 몸짐이 크며 몸에 칼을 다섯개나 차고 좌우 사람이 감히 우러러보지 못했다. 항상 속관에게 땅에 엎드리라고하여 그 등을 밟고 말에 올랐다』고 돼있다. 자기네 「천자」에게 패전의 수모를 안겨준 장본인을 잘 쓸리가 없었다.
우리의 야사 『환단고기』에 『의표가 웅위하고 의기가 호일하며, 언제나 군졸과 함께 거적을 깔고 잤다』고 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재평가에 누구보다 앞강 섰던 단재 신채호의 『조선 상고사』에는 『봉건세습의 호족 공화제를 타파하여 정권을 한 곳에 모아 분립의 대국을 통일했으며, 입구하는 당 태종을 격파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진격하여 중국 전국을 진동했으니 혁명가의 기백과 재략을 아울러 가졌다』고 그를 높이 평가했다.
다만 그가 죽을때 『따로 현재를 골라 자기 뒤를 이어 조선인 만대의 행복을 꾀하지 못하고 불초자 형제(남생·남건·남견)에게 대권을 맡겨 스스로는 물론 국가의 패망을 가져왔으니 야심은 많고 「공덕」이 적었던 인물』이라고 했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죽은지 2년만에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어쨌든 우리 역사에는 기록이 일실돼 버린 명장 연개소문이 중국에서는 전설·소설·경극 등으로 남아지금까지 전해진다고 하니 아이로니컬 하다.
특히 오늘과 같은 시대에 자립·자존·자강의 의지를 몸소 실천한우리 역사상의 위대한 인물을 재조명하는 것은 우리 역사학자들의 사명이며 의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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