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무장관실의 셰퍼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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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801호 외무장관 집무실.
국내외의 관심이 집중된 한미정례외무장관 회담을 앞두고7일 하오4시쯤 회담장인 장관실의 준비상황을 마무리체크하고 있던 비서진들의 눈앞에 일찌기 듣도 보도 못한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장관실 입구에 덩치 큰 셰퍼드 한 마리가 코밑을 바닥에 대고 구석구석 냄새를 맡으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개 끈을 잡은 한 미국인이 뒤따랐다. 순간 한 직원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개 주인에게 의전절차를 무시한 무례한 침입을 꾸짖었다.
「슐츠」장관의 경호를 맡고 있다는 이 미국인은 장관의 예정된 코스를 사전 점검하는 임무를 수행중이라면서 셰퍼드는 폭약냄새를 아주 갈 맡는다고 대꾸했다.
『사전양해가 전혀 없으니 당장 철수하라』는 요구에 그는 『로컬 폴리스 (한국경찰)와 회의실주변 수색에 관해 협의가 돼있다』며 막무가내였다. 수색을 마친 「셰퍼드 일행」은 장관실을 나와 문 앞에 깔린 귀빈용 붉은 카피트를 밟고 왔던 길을 되돌아 귀빈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바로 며칠전 「대처」영국수상이 탔던 그 엘리베이터였다.
「장관실의 개(견)출몰」은 우리측에 전혀 사전통보가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측의 항의를 받은 주한 미 대사관측은 「슐츠」장관 수행경호팀이 독자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사전에 몰랐다고 답변했다.
최근 세계도처에서 빚어지고 있는 미국인들에 대한 테러 위협을 의식해 「폭발물 히스테리」가 빚어낸 해프닝으로 돌려야 할까, 아니면 국내에서의 과격한 반미시의에 대한 과민한 반응으로 돌려야 할까. 장관실의 개 파동은 여러 가지 분석과 노기 섞인 반응을 낳고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셰퍼드 일행」이 임무완수를 보고하는 순간 우리정부가 국력신장과 함께 공들여 쌓아온 의전의 관례·노하우(Knowhow)·자존심은 여지없이 추락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국가의 「의전심장부」가 개 한 마리의 전격기습으로 큰 상처를 입게된 것이다.
청사관리소 고참관리의 얘기가 오랜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정부청사가 생긴 이래 개가 장관실을 들쑤시고 다녔다는 것은 처음 듣는 소리다. 미국사람들이 이러고 다니니 도처에서 반미소리를 듣게되지….』 【박보균 정치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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