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통화의 분쟁 가능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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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엔화의 강세가 예상보다 빠르게 진전되면서 국제 통화 조정이 큰 고비를 맞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한때 달러 당 1백75엔 선을 돌파했던 엔 강세는 계속 1백70엔 대에서 등락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정부 관계자들이 드디어 외환 시장 개입을 시사함으로써 달러·엔 통화조정은 지난해 9월 G5 회담 이후 최초로 본격적인 환시 개입을 초래할 공산이 커졌다.
이번 일본 수상의 환시 개입 시사가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것이 일본 고위 당국자의 최초의 시사일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엔화의 방어 한계선을 제시한 점과 과도한 엔 강세에 독자적으로 대처할 뜻을 분명히 한 점등이다. 그가 밝힌 한계선은 달러 당 1백74엔으로 이 선을 넘어서면 중앙은행이 시장 개입을 통해 엔 방어를 개시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되면 엔고 현상은 다른 요인이 생기지 않는 한 반락세로 돌아설 것이 분명하고 일본측이 희망하는 1백80엔대 이상으로 떨어질 것 또한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 측이 여전히 엔 실세화를 고집하고 있고 최소한 달러 당 1백60엔 이상 진전되기를 원하고 있어 어차피 통화 조정은 한차례 파란을 겪을 소지가 많다.
이 같은 미일의 상반된 입장은 애초부터 언젠가는 겪어야할 파란을 예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칫하면 G5의 합의를 무색케 할 통화 분쟁의 소지마저 안고 있다. 오는 5월의 7개국 정상 회담 전까지 적절한 타협안이 제시되지 않으면 정상 회담의 실질 성과마저도 크게 기대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문제는 일본의 산업이 어느 선까지의 엔고를 감당할 수 있느냐와 미국의 주문이 어느 선까지 관철될 것인지에 달려 있다. 이 점에서 보면 미일간의 통화 조정은 이제 파워 게임의 마지막 라운드에 가까와져 있는 셈이다.
우리의 관심은 우선 국제 통화 조정이 분쟁이나 큰 파란 없이 G5의 합의 정신을 완성할 수 있을지, 또는 그 같은 조정 과정이 국제 무역의 안정적 확대를 교란하거나 우리의 외채관리에 어려움을 만들어내지 않을지가 주요 관심사다.
국제 통화 사정이 불안정해지면 언제나 우리 같은 외채 의존 경제가 가장 큰 타격을 입어온 전례에 비추어 있을 수 있는 여러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만전의 대비가 미리 강구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시급한 일은 엔고 현상 자체의 대비책이다. 설사 미일간에 통화 분쟁이 일어나더라도 엔 시세는 상당 부분이 「현실화」된 고수준을 유지할 것만은 분명하다.
따라서 지금 벌써 국내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는 대일 수입 부담을 완화하는 작업은 앞당겨지지 않으면 안 된다. 부품과 소재 산업은 물론 자본재 산업까지도 대일 일변도의 의존을 획기적으로 탈피해야한다. 이들 산업의 국산화를 과감히 지원하고 과도적으로는 수입 선을 다변화해 가면서 엔고의 부담을 이중으로 완충하는 대응책이 마련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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