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텔링] 경찰, "세로드립 무죄. 심사에서 걸렀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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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 시 공모전. 잊혀졌던 거인의 발자취를 다시 그리다’

보수단체인 자유경제연구원은 지난해 12월, 이듬해 3월로 예정된 시 공모전 개최 소식을 알렸습니다. ‘건국대통령 이승만을 기리는 모든 주제’로 창작시를 접수받아 대상ㆍ최우수상ㆍ우수상ㆍ입선을 가려 약간 명을 시상하겠다는 취지였습니다. 공모전에 대한 성원이 뜨거웠다고 합니다. 주최 측은 3월 1일부터 6일까지던 접수 일정을 “응모자가 많아” 7일까지로 하루 연기했습니다.

친구로부터 공모전 소식을 접한 대학생 장민호(24)씨는 이정환이라는 필명으로 ‘우남찬가(雩南讚歌)’를 출품했습니다. 우남은 이승만의 호인데, 제목 그대로 이승만을 건국 아버지로 칭송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시는 가로로 읽을 때와 세로로 읽을 때 그 결이 다릅니다. 어려운 말로는 아크로스틱(acrostic)이라는 건데, 흔히들 ‘세로 드립’이라고 합니다.

(전략)
가의 아버지로서 국민을 보듬고
족의 지도자 역할을 하셨으며
려진 이땅의 마지막 희망으로
민군의 압제에 당당히 맞서니
리어 두만강까지 밀고 들어가
국의 판세를 뒤엎고 솟아올라
유민주주의의 기틀을 잡으셨다”
(후략)

가로로 보면 칭송 일변도입니다. 세로로 읽으면? ‘국민버린도망자’가 됩니다.

장씨는 공모전에서 입선했고, 상금 10만원도 받았습니다. “심사위원들이 걸러낼 줄 알았다”던 그는 인터넷 게시판에 “상금으로 여자친구와 고기 한 끼 사먹었다”고 썼습니다.

“피고 장민호는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 및 정보통신망법 상 명예훼손, 사기 혐의로 고소장이 접수되었습니다.”

그러던 5월, 장씨는 경찰서로부터 출두하라는 문자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발끈한 자유경제원이 장씨의 수상을 취소하고 업무방해와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경찰에 고소한 겁니다. 자유경제원은 경찰에 고소한 것과는 별개로 “손해배상금 5700만원을 지급하라”며 민사소송도 제기했습니다. 이에 대해 장씨는 “시에 내재된 의미를 주최 측도 쉽게 파악할 것이라고 예상한 본인의 소견이 신중하지 못했던 점에 대해서는 사과드린다”면서도 “심사위원들의 판단 미숙으로 발생한 사태의 책임은 전적으로 공모전 주최 측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경찰은 7일 장씨의 혐의가 없다고 판단해 각하 의견으로 검찰에 사건을 넘겼습니다. 경찰 관계자는 ”장씨가 사용한 기법은 문학작품에서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 심사단계에서 걸러낼 수 있었다“며 ”상금으로 고기를 사먹었다는 것을 명예 훼손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윤재영 기자 yun.jaey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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