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정 참관 변호사가 적은 메모, 경찰이 제출 요구한 것은 변론권 침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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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20일 인천시의 한 경찰서 진술조사실. A변호사는 사문서 위조 등의 혐의로 조사를 받는 의뢰인 B씨의 대질신문 과정을 참관했다가 황당한 일을 겪었다.

의뢰인의 진술 내용 등을 수첩에 메모했는데 조사가 끝나자 담당 수사관이 "메모한 내용을 보여달라"고 한 것이다. 이 수사관은 "변호인이 메모한 내용을 토대로 피의자의 진술 번복 등을 유도해 신문을 방해했다"며 "메모한 내용을 확인하겠다. 수첩을 달라"고 요구했다.

해당 수사관의 끈질긴 요구에 A변호사는 수첩 안의 메모 내용을 보여줘야 했다. 이후 A 변호사는 국가인권위원회에 '경찰이 사실상 강압적으로 메모 내용을 요구했다'는 내용의 진정서를 냈다.

인천지방변호사회는 24일 A변호사가 낸 진정서에 대해 "피의자 측 변호인이 정리한 메모를 경찰이 제출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변론권 침해라는 판단이 나왔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경찰 수사관이 피의자와 참고인 대질 신문 과정에서 변호사가 양측의 진술을 메모한 내용을 '제출하라'고 요구하고 해당 내용을 확인한 것은 변호인의 변론권을 무시하고 인권을 침해한 것"이라며 "해당 경찰서장은 변호인의 조력할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고 피의자 신문 시 변호인이 작성한 메모의 제시를 요구할 수 없음을 소속 경찰관들에게 교육하라"고 권고했다.

인권위는 수사기관의 메모 확인 행위가 사실상 강요가 될 수 있고, 변호사가 메모한 내용이 사생활의 영역에 해당된다고 봤다. 변호 전략의 노출로 변호인의 조력할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고도 지적했다.

인권위는 또 "경찰 신문을 방해할 수 있다고 해도 '메모 제출 요구'라는 방법은 적절하지 못하고 법령에서 허용하는 기록 환기용 메모 행위까지 위축시켜 변호인 조력을 받을 피의자의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인천변호사회는 "변호인이 경찰이나 검찰에서 기억 환기나 방어권 구상을 위해 메모한 용지를 수사관이 검사하는 행위는 헌법과 법률에서 보장하는 변호인의 변론권에 대한 명백한 침해"라며 "이런 변론권 침해 행위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인천=최모란 기자 m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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