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 미술

한여름 낮의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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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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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
미술평론가

한여름 낮의 꿈이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 대구미술관을 나오며 느낀 소감이다.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는 중국 미술가 양푸둥(楊福東)의 국내 첫 개인전(10월 16일까지)이 열리고 있다. 대가든 새롭게 뜨는 미술가든 세계적 작가가 국내에서 본격적인 첫 개인전을 가질 때는 항상 그 무대가 서울이었는데, 이렇듯 대구에서 양푸둥의 대규모 전시를 보니 문화의 서울 편중이 조금씩 깨져 가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중국 작가 ‘양푸둥’ 첫 개인전

내가 양푸둥의 예술을 흥미롭게 보는 것은, 그가 형상적 사고의 특징과 힘을 매우 잘 보여주는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고는 크게 언어적 사고와 형상적 사고 둘로 나눌 수 있다. 언어적 사고가 의식과 이성에 의지하고 있다면, 형상적 사고는 무의식과 감성에 의지하고 있다. 형상적 사고는 무엇인가. 꿈속에서 전개되는 사고가 대표적인 형상적 사고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내가 꿈속에서 우산을 들고 거리를 걷고 있다. 우산 손잡이는 갈고리 모양의 플라스틱 손잡이다. 그런데 누가 옆에서 말을 건다. 그와 대화를 나누고 고개를 돌려보니 손잡이가 변해 있다. 갈고리는 갈고리 모양인데 플라스틱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쇠갈고리다. 갈고리 위를 쳐다보니 우산대가 아니라 사람의 팔이 보인다. 그 위로 후크 선장이 나를 무섭게 내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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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푸둥의 비디오 작품 ‘내가 느낀 빛’(왼쪽 사진)과 ?야장?. 마치 꿈을 꾸는 듯하다. [사진 대구미술관]

이처럼 꿈에서 우산 손잡이가 후크 선장의 갈고리 손으로 변한 것은 논리적 전개에 따른 게 아니다. 특정한 이미지가 유사한 이미지를 불러온 것이다. 유사하지만 좀 더 무서운 형상으로 변한 것은 꿈속에서 비가 내리던 으스스한 상황과 관계가 있을 것이고, 그 으스스한 상황은 내 안의 불안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나의 희로애락과 실존적 정념을 기초로 이를 반영하는 이미지나 형상 사이에 ‘매칭’이 일어나 전개되는 것이 형상적 사고다. 본질적으로 논리와는 멀고 창의력·상상력·직관력과는 가깝다.

형상적 사고에 크게 의지하는 양푸둥의 영상작품을 보는 것은 그래서 한 편의 꿈을 꾸는 것 같다. ‘내가 느낀 빛’ ‘야장’ ‘다시 갇히다’ ‘지아의 가축’ ‘장군의 미소’ 등 대표작을 모아놓았으니 하나의 꿈이 아니라 여러 편의 꿈을 집중적으로 꾸는 것 같다 하겠다. 작품에 따라서는 관자의 시각에서 스토리를 만들어볼 수 있는 것도 있겠지만, 꿈이 기승전결을 따르는 게 아니듯 그의 작품은 본질적으로 그런 정연한 플롯을 갖고 있지 않다. 그가 보여주는 형상들, 이미지들을 따라가며 그것들 사이에서 어떤 매칭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 내면의 어떤 감정들을 자극하는지 집중해서 보노라면, 꿈에서 그런 것처럼 우리는 높은 긴장감과 긴박감, 막연한 두려움, 아득한 그리움, 아스라한 즐거움 등 다양한 근원적 정서를 생생히 느낄 수 있다.

그 정서적 힘과 인상이 워낙 강렬해 본 작품을 다시 또 보게 만드는 데 양푸둥의 힘이 있다. 우리는 양푸둥의 예술이 우리의 근원적 경험이나 본질적 감정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한낮 미술관에서 잊지 못할 꿈을 꾸고 나서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주헌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