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71)-제84화 올림픽(20) 동메달에 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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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역도에서 첫 메달을 따낸 뒤 우리 선수단의 사기는 충천해 남은 복싱경기에서도 선전을 다짐했다.
복싱엔 런던올림픽 동메달리스트 한수안(플라이급)과 페더급의 서병난이 재도전했고 신예 강준호(밴텀급)와 주상점(라이트급)도 투혼을 불태웠다.
그러나 해외정보에 어두웠던 우리 복싱은 계체단에서부터 문제에 봉착했다. 이번 대회부터 라이트 웰터급이 신설되는 바람에 페더급과 라이트급의 한계 체중이 각각 57kg(종전 58kg)과 60kg(종전 62kg)으로 낮추어진 것이다.
이 때문에 서병난은 1kg 감량에 별 무리가 없었으나 주상점은 2kg이나 줄이게 돼 큰 부담을 안게 되었다.
특히 주는 평상 체중이 67kg을 오르내리고 있어 7kg을 줄이고도 경기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주상점은 식사를 거의 굶다시피 하며 체중을 조절, 계체량엔 통과했으나 1차전에서 체력을 감당하지 못해 판정패하고 말았다.
서병난은 1차전을 판정승으로 통과했으나 2차전에서 우승자인 체코의 왼손잡이 「자카라」를 잡지 못해 판정패로 탈락했다.
관록을 자랑하는 한수안은 1차전을 통쾌한 RSC승으로 통과하고 2차전에서 판정승, 준준결승전에 진출했으나 강적 「토멜」(남아프리카공화국)을 만나 판정으로 물러앉고 말았다.
이런 중에 강준호는 1차전을 부전승으로 통과하고 2, 3차전에서 판정승, 준결승에 진출했다. 격전을 치르는 동안 두 눈이 시퍼렇게 멍이 든 강은 준결승에서 에이레의 「맥넬리」를 맞았다.
은메달 고지를 향해 링에 오른 순간 강준호는 당황하여 눈앞이 깜깜해졌다. 갑자기 본부석에서 임원 한 명이 내려오더니 오른손 글러브를 벗어보라고 한 것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오래 전에 생겼던 손등의 상처를 지적하면서 엉뚱하게도 『피부병이니 경기를 할 수 없다』 며 실격을 선언할 자세였다. 당사자뿐만 아니라 한국 임원들도 크게 분개했다. 김명곤 감독 등이 집요하게 항의, 10분동안 옥신각신하다 결국 경기를 하도록 인정됐다.
그러나 엉뚱한 일로 충격을 받은 강준호는 제 실력을 발휘해보지도 못하고 판정패했다. 이번 대회부터는 3, 4위전 없이 동메달을 수상했으므로 강준호는 더 이상 경기 없이 동메달에 머물러야 했다.
한국선수단의 두 번째 동메달은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이룩됐다. 강준호의 메달 뒤안길엔 일생일대의 모험담이 숨겨 있어 더욱 인상적이다.
23세의 강준호는 최전방을 지키는 수도사단 소속의 일등병이었다. 황해도 해주출신인 강은 처음 육상 장거리를 뛰다 복싱으로 전환, 6·25동란 전에 이미 북한의 페더급 챔피언이 됐다.
1·4후퇴 때 자유를 찾아 남하해 수도사단에 현지 입대한 강은 전투를 치르면서도 틈틈이 몸을 단련하며 올림픽 출전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군인의 몸으로 선발전 출전은 엄두도 내지 못해 안달만 할뿐이었다.
강준호는 참다못해 가짜 휴가증을 갖고 부대를 이탈, 51년 광주 전국체전에 출전했다. 이어 이듬해 봄엔 부산으로 내려가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최강자인 박금현을 꺾고 우승했다.
전시의 탈영은 엄청난 범죄였으므로 강은 『경기에서 지면 내 인생도 끝장이다』는 각오로 죽을 힘을 다했던 것이다.
뒤늦게 이 같은 사실을 알게된 한신연대장은 『이처럼 훌륭한 선수를 전투에서 잃게 했더라면 국가적으로 얼마나 큰 손해일뻔 했느냐』며 부하를 경기장으로 보내 격려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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