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65) - 제84화 올림픽 반세기(14)| 김성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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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8·15 해방-. 이 땅엔 어둠이 몰려가고 소생의 기쁨이 찾아왔다.
전쟁에 광분하던 일제의 사슬 속에 바벨을 놓았던 나는 해방과 더불어 다시 역도를 시작, 굳었던 몸을 풀었다.
대학졸업 후 25세 때 결혼한 나는 해방되던 해에 큰딸을 낳아 어엿한 가장이 되었다.
해방 후 잠시 한양공고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모교인 휘문중학으로 자리를 옮겨 역도부를 지도하며 내 자신 훈련에 정진, 한창 때의 페이스를 되찾게 됐다.
역도연맹은 이병학 회장이 중심이 되어 신당동에 일본인 창고건물을 구입, 본격적인 훈련으로 역도 재건에 힘썼다.
신당동 도장에 「존·데이비스」라는 미군병사가 우연히 운동하러 찾아왔던 것이 한국역도가 세계무대에 첫선을 보이는 계기가 됐다.
미국 역도 헤비급선수인 「데이비스」는 우리 선수들이 연습하는 것을 보고 높은 수준에 깜짝 놀라 본국 역도계에 편지로 이 사실을 알렸다.
이리하여 미국 역도계 유지인「봅·호프먼」이 필라델피아 세계역도선수권대회에 나와 남수일을 출전시켜주도록 초청장을 보내왔다.
역도연맹은 1명이라도 더 출전시키자는 욕심으로 박동욱(56kg급)을 추가, 일행 3명이 47년9월16일 장도에 올랐다. 해방 후 해외원정경기로는 보스턴마라톤(46년4월), 서울축구팀 상해원정(47년4월)에 이어 세 번째였다.
임원도 없이 출발한 우리 세 선수는 뉴욕에 도착, 월터 정의 마중을 받았다.
뉴욕공항에서 우리는 한차례 곤욕을 치러야 했다. 미국의 기자들이 몰려나와 「동양의 역사」들을 환영해준 것까지는 좋았으나 장난 비슷하게 우리가 무동을 탄 포즈로 사진을 찍자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내 어깨에 남수일이 오르고 다시 그 위에 박동욱이 올라 거뜬하게 서서 포즈를 취했지만 좀 창피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경기는 9월26, 27일에 걸쳐 필라델피아 컨벤션홀에서 벌어졌다. 60kg급의 남수일은 6백78파운드로 은메달, 나는 75kg급에서 7백78파운드로 동메달, 56kg급의 박동욱은 5백67파운드로 4위에 올랐다.
종합성적에서 우리는 미국에 이어 2위. 첫 세계대회에서 거둔 성적으로는 놀라운 성과였다.
그러나 가난한 신생국의 우리선수들은 경기가 끝나자마자 여비가 떨어져 고생길에 접어들었다.
사실 우리는 얼마의 여비를 갖고 갔는지도 몰랐다. 우리는 여비가 든 봉투를 봉함한 채로 안내자인 월터 정에게 맡기도록 지시를 받았던 것이다.
월터 정은 우리의 여비가 바닥나자 자신의 월급을 가불해서까지 우리를 돌봐주었다.
우리는 우선 숙소를 뉴욕의 재미경제인 이원정씨 집으로 옮기고 여비마련에 나셨다. 월터 정은 뉴욕 한인교회에서 냉면파티를 열고 모금을 호소하는 한편 미국역도연맹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행기삯 마련이 여의치 않자 우리는 최후로 미국체육회(AAU)를 찾아가 어려운 사정을 얘기하고 도움을 약속 받았다.
결국 미국체육회의 호의로 경기가 끝난 지 20여일만인 10월20일 가까스로 귀국할 수 있었다.
우리 나라 스포츠외교에 큰 역할을 해온 월터 정-. 나는 지금도 그가 자상하게 우리를 돌봐주던 그때를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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