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에 포위된 파운드화···S&P "준비통화 지위 잃을 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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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역풍(Market Repercussion)’이 거세다. 영국이 브렉시트를 선택한 이후 글로벌 시장에선 파운드 투매, 주식 공매도 등이 잇따라 일어나고 있다. 28일(현지시간) 파운드화와 영국 주가는 일부 반등했지만 브렉시트 이틀 만에 파운드 값은 10% 추락했다. 영국 주가도 6% 떨어졌다.

신용등급 추가 하락 우려 커져
영국, 시장 개입 땐 통화전쟁 불가피
28일 유럽증시는 장 초반 반등세

영국 가디언은 27일 “누가 조율하지도 않았는데 역풍이 파상적이다. 시장이 영국을 때리는 수준”이라고 전했다. 이런 영국 때리기는 금융시장의 ‘이기적 동맹’이 작동한 탓이다. 이기적 동맹은 각종 시장 참여자들이 각자 이익을 좇아가지만, 결과적으로 동일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현상이다. 베리 아이켄그린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교수는 이기적 동맹을 ‘늑대 떼(Wolfpack) 공격’이라고 불렀다. 늑대가 떼지어 다니며 먹잇감을 포위 공격하는 모양과 닮아서다.

이번 브렉시트 국면에선 “퀀트(Quant)와 매크로(Macro)펀드들이 이기적 동맹의 핵심”이라고 블룸버그통신은 전했다. 퀀트펀드는 고도 수학을 활용해 금융시장 움직임을 컴퓨터 프로그램화해 사고파는 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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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운드화가 이틀간 추락하다 28일 아시아 시장에서 조금 올랐다. 흐름 전환을 말하기엔 이르다. 사진은 이날 서울의 한 금융회사 외환 딜링룸의 모습 . [AP=뉴시스]

톰슨로이터 등은 “퀀트펀드가 브렉시트란 사건에 맞춰 각종 자산의 가격 등락에 따라 주식·채권·통화·파생상품 등을 사고팔 프로그램을 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블룸버그는 “그들이 처분할 물량이 3000억 달러(약 350조원) 정도”라고 전했다.

매크로펀드는 헤지펀드의 일종이다. 이들은 브렉시트 같은 대형 사건을 예측해 베팅한다. 적잖은 매크로들이 브렉시트를 예상하고 파운드와 영국 주가를 공매도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헤지펀드 매니저들이 달러 기준 파운드 가격이 1.1달러까지 떨어질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이렇게 영국이 역풍을 맞자 국제 신용평가사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영국의 신용등급을 최고 단계인 ‘AAA’에서 ‘AA’로 두 계단 낮췄다. 영국계 신용평가사인 피치는 ‘AA+’에서 ‘AA’로 한 단계 내렸다. 앞서 무디스는 영국의 신용등급을 유지했지만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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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 발표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파운드화가 ‘준비통화(reserve currency)’로서 지위를 상실할 수 있다는 경고다. 준비통화는 세계 각국이 대외지급을 위해 보유하는 통화다. 런던이 유럽의 금융중심지가 된 것도 파운드화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현재 각국 중앙은행이 보유한 준비통화 중 파운드화 비율은 4.9%였다. S&P는 이 비율이 3%로 이하로 떨어지면 준비통화로 분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준비통화의 기본 요건은 통화가치의 안정성이다. 값어치가 떨어지면 각국 중앙은행들이 파운드화를 보유할 동기와 의욕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중앙은행들의 외면은 파운드화 가치를 수직 추락시킬 수 있다. 파운드 값 하락은 영국 정부의 자금 조달을 어렵게 해 추가 신용등급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악순환이다. 지금 상황에선 달러나 엔 같은 다른 준비통화의 강세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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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강세를 감수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엔화 흐름을 약세로 돌리려고 시장 개입을 공언한 일본의 아베 정부처럼 말이다. 미국 역시 달러화 강세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금리를 올리지 않을 수 있다. 부지불식간에 자국 통화가치를 낮추려는 통화전쟁의 방아쇠가 당겨지게 되는 것이다.

이번 브렉시트 선택에서는 영국인의 자존심이 한몫했다. 로이터는 “그들이 브렉시트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가 영국이 이민자들에 의해 어지럽혀지는 것에 대한 반발”이라고 했다. 이런 자존심의 기회비용이 시장의 역풍을 불러온 이유다.

뉴욕=이상렬 특파원, 강남규 기자 is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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