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환상과 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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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난3월 서기장에 오른 「고르바초프」 가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당과 행정부 등 통치체제의 개편이었다.
이 작업은 연로하고 보수적인 구체제 인물을 대거 퇴진 또는 후퇴시키고 자파의 젊은 개혁파 기술관료를 중용함으로써 6개월만에 끝났다.
「고르바초프」는 이제 정책의 개편에 착수했다. 그 윤곽을 드러낸 것이 15일 소련공산당 중앙위 전체회의에서 나타난 「경제개발15년 계획」 이다.
이것은 2000년대 진입의 마지막 준비작업 일뿐 아니라 예상되는 「고르바초프」통치구상의 구체적인 표현이라는 데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고르바초프」의 15년 계획은 금세기 말까지 국민소득을 지금의 2배(80년 현재의 1인당 GNP 4천5백50달러)로 올리고 노동생산성을 30∼50% 향상시키며 국민의 생활은 양이 아닌 질적 충족을 누리게 한다는 골자다.
「고르바초프」는 이 같은 계획을 발표하면서 50년 말에서 60년대 초반까지 계속된 「흐루시초프」 정책이「근거 없는 환상」 에 그쳐 실패했다고 비판했다.
당시 「흐루시초프」 는 『공업분야에서는 70년대까지 미국을 앞지르고 80년대까지는 완전한 공산사회를 이룩하겠다』 고 호언하면서 「스탈린」 식의 강력히 통제된 중공업위주에서 벗어나 비교적 완화된 농업 및 경공업중시 정책을 추진했었다.
이 같은「흐루시초프」의 꿈은 군부 및 특권관료계층의 반대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흐루시초프」의 계획을 실패로 몰아넣은 장애요인이 아직 그대로 엄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르바초프」 의 꿈이 과연 환상적인 근거에서 벗어날 수 있을는지는 아직 의문이다.
공산주의 이론의 창시자인 「고르바초프」는 그의『경제비판요강』에서 서구 자본주의가 1858년에 붕괴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19세기의 56∼57년 유럽자본주의세계를 휩쓴 화폐공황을 바라보면서 경쟁을 통한 이윤추구를 모토로 하는 자본주의는 더 많은 이윤추구에 몰두한 나머지 중산층과 노동자를 빈곤하게 만들어 결국은 그들의 봉기에 의해 타도될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자본주의의 멸망을 보지 못한 채 1883년에 사망했고 그후에도 자본주의는 계속 발전하여 그의 기대는 환상으로 끝나고 말았다.
기묘하게도 「흐루시초프」 와 「고르바초프」 모두가 「중앙통제계획의 축소」와 「경영의 합리화」 「국민의 소비욕구충족」 의 지향에서 일치하고있다.
이것은 바로 「고르바초프」가 그처럼 저주하고 비판했던 자본주의적요소인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환상과 실패 속에서도 발전을 거듭해 왔고, 발전이 거듭될수록 자본주의에 접근돼왔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그 같은 수정주의는 동구와 중공, 그리고 북한에서까지 채택돼 나가고 있어 오늘날 공산주의 경제노선의 대세로 정착돼 가고 있다.
「고르바초프」의 15년 계획 추진은 동구와 서구의 동질화를 통해 결국엔 EC(유럽공동체)와 코메콘(동구상호원조기구) 을 통합한다는 그의 원대한 「대유럽구상」 의 일환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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