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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경은 판도라의 상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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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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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논설위원

썰렁한 아재 개그 하나. 추경호 새누리당 의원(일자리특위 부위원장)은 추경을 좋아할까. 답은 그렇다. 추경, 호(好)니까. 실제 추경호는 엊그제 일자리 특위에서 ‘대규모 추경’을 정부에 주문했다. 추경호는 기획재정부 출신이다. 직전 국무조정실장도 했다. 총선 땐 친박(親朴)으로 분류됐다. 그런 그가 ‘빅 추경’을 말했다면 이미 청와대·당·정부와의 교감이 끝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기야 유일호 경제부총리도 지난주 추경을 말했다. “적당한 정책 조합을 만들어 빨리 발표하겠다”고 했다. 얼마 전 “추경은 결코 없다”던 그 유 부총리가 맞나 싶을 정도다. 야당도 추경을 부추긴다. 청년 실업과 일자리 대책이 시급하다는 게 이유다. 모처럼 여야가 한목소리니 추경은 이제 다된 밥이다. 얼마로 할지, 어디다 쓸지만 남았다. 벌써 다음주 15조원 규모의 추경 발표가 있을 것이란 관측이 세종시 관가에 쫘악 퍼지고 있다.

나는 이번 추경을 반대한다. 열어선 안 될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유는 세 가지다. 우선 명분이 없다. 정부는 국가재정법 89조를 이유로 든다. ‘경기 침체·대량 실업 우려’다. 구조조정이 가져올 후폭풍, 대량 실업과 사회 혼란이 겁난다는 얘기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서 구조조정에 겁먹은 장수의 얼굴을 떠올릴 뿐이다. 환부를 신속·정확하게 도려낼 자신이 없으니 진통제만 잔뜩 준비하려는.

둘째, 야당의 물타기다. 더불어민주당은 추경에 누리과정과 청년 일자리 예산 등을 얹겠다고 벼른다. 구조조정 청문회는 덤이다. 우상호 원내대표는 ‘서별관회의 청문회’를,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구조조정 청문회’를 밀어붙이고 있다. 추경이 목적인지, 청문회가 목적인지 헷갈릴 정도다. 추경은 논의부터 집행까지 좌충우돌, 정쟁(政爭)의 수단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추경호(號)는 산으로 가고, 발 빠른 경기·일자리 대응이란 본래 목표를 잃게 될 것이다.

셋째, 불필요한 증세 논란이다. 정부는 세입 추경도 늘리자는 쪽이다. 올해 세금이 잘 걷히고 있다는 게 이유다. 이런 단견이 없다. 더 걷힌 세금은 나랏빚을 줄이는 데 써야 한다. 게다가 정부가 세입을 늘린다고 하면 야당은 옳다구나 법인세 증세를 말할 것이다. 법인세 증세를 반대해 온 정부가 앞장서 빌미를 주게 된다. 이런 자가당착이 없다.

추경은 국가의 비상금이다. 쓰고 남은 예산은 국가 부채를 갚는 데 먼저 쓰게 돼 있다. 그런데 역대 정부는 추경에 홀랑 썼다. 태풍 불면 추경, 가뭄 들면 추경을 했다. 당대의 성장률 몇 %에 집착해서다. 노무현 정부가 악습을 끊자며 총대를 멨다. 추경 요건을 ‘천재지변’급으로 제한했다. 지난 정부는 5년간 딱 두 번 추경을 했다. 이 정부는 벌써 두 차례 추경을 했지만, 장담했던 성장률 3% 달성은커녕 2%도 허덕이고 있다. 대신 나랏빚은 눈덩이처럼 불었다.

그럼에도 유일호 부총리가 추경으로 돌아선 이유는 알겠다. 구조조정은 야당엔 꽃놀이패다. 계속 압박만 하면 된다. 대량 실업, 산업 실패, 경제 후퇴…. 모두 공격 호재다. 본래 수비가 더 어려운 법이다. 지금까지는 이 정부 책임이 아니라고 발뺌하면 됐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그럴 수 없다. 구조조정이란 고삐는 한 번 쥐게 되면 결과만으로 말해야 한다. 그 결과가 대량 실업과 국민 혈세 낭비라면 누가 납득하겠나. 겁나지 않는다면 그게 비정상일 것이다. 그런 판국에 야당이 재정으로 도와준다는데 불감청 고소원, 안 받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정답이 아니다. 지금까지 돈을 안 풀어 경제가 허덕였나. 경제를 살리려면 돈 풀기보다는 구조조정을 통한 구조개혁이 먼저란 건 이제 삼척동자도 안다. 유일호는 추경 대신 “내가 총대 메겠다. 죽든 살든 (구조조정) 해보자”고 해야 했다.

바라건대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말라. 하지만 결국 상자는 열릴 것이다. 그러니 역시 신화에 기대본다. 추경의 문을 기어코 열고자 한다면 구조조정에 올인하라. 그것이 판도라의 상자 속 마지막 구원자, 희망의 메시지일 것이다.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