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의 한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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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난번 북한의 고향방문단이 남녘 땅을 밟자마자 그 쪽 대표 한사람이 대뜸 『나를 안내할 놈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 우리 쪽을 당혹케 한 일이 있다. 북에서 쓰는「놈」이란 말이 남에서처럼 「사내」의 낮춤말과는 뉘앙스에 차이가 있겠지만 어딘가 점잖치 못한 것은 틀림없다.
4전년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희로애락의 감정 표현을 같은 감수성, 같은 언어로 해왔던 우리 민족이 불과 40년만에 이렇게 서로의 모습을 달리 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그아픔의 무게와 깊이를 느끼게 된다.
「분단 40년」은 국토의 분단뿐 아니라 말과 생활과 생각까지도 이렇게 심각한 단절을 가져온 것이다.
언어는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물처럼 항상 자연스럽게 변하게 마련이다.
북한은 l949년부터 한글전용정책을 써오면서 언어의 자연적 흐름의 특성을 무시하고, 그것을 사람들의 사상을 개조하며 자연과 사회를 개혁하는데 필요한 도구로써 왔다. 그래서 북한의 언어는 처방적이고 규범적일뿐 아니라 인위적이고 작위적이다.
북한은 또 54년에 그들 나름대로의 이른바 「조선어 철자법」을 마련하여 철자법은 형태주의에 입각해서 두음법칙은 물론 24자모까지 부정하고 40자모를 채택하여 덧붙여진 된소리와 복모음은 자모 배열법에서도 우리와 큰 차이를 보인다.
이렇게 이질화된 언어정책으로 말미암아 북한주민들이 쓰는 일상어가 우리에게 생소하게 들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가령「월급」이「달품」으로, 「예매」가 「미리 팖」등으로 둔갑한 것이 그 좋은 예다.
북한사회에서는 관용어에도 큰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들을 재미가 있다」를 「귀맛이 돌다」로,「몹시 급히 뛰다」를「네굽을 놓다」로,「남보다 먼저 시작하다」를「선코를 놓다」로 쓰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속담이나 민속도 북쪽에서는 현체제에 맞게 뜯어 고쳐 사용한다. 가령 『생감 등때기 같다』는 말은 몹시 뻔뻔스럽고 염치 없음을 「땡감껍질」에 비유한 속담이다. 또 팔자소관이란 말을 『팔자 도망은 못한다』 라고 한다든지, 떼를 쓰고 사정하는 것을 비유해서 『떼가 사촌보다 낫다』는 속담을 만들어 냈다.
말이란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을 담는 그릇이다. 그릇의 모양이 다르고 색깔이 다르면 인간의 인식구조가 달라지고, 나아가서는 가치관까지 달라진다.
아직까지는 남과 북이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큰 불편이 없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더 오래 지속된다면 국토의 분단보다 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은 뻔하다.
따라서 언젠가의 통일에 대비하여 우리의 국어연구도 더욱 박차를 가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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