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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루게릭 환자의 소리 없는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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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헌
이정헌 기자 중앙일보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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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던 지난 17일 오전 일본 도쿄 중의원 회관. 휠체어에 앉은 채 인공호흡기 호스를 입에 문 남자가 들어섰다. 화난 눈빛의 오카베 히로키(岡部宏生·58). 뇌의 명령이 신경을 통해 근육에 전달되지 않아 온몸이 굳어버리는 근위축성측삭경화증(ALS) 환자다. 난치병인 ALS는 미국 프로야구 뉴욕 양키스팀의 전설적인 1루수이자 4번 타자인 루게릭이 앓았던 운동신경 장애다. 1941년 38세에 숨진 그의 이름을 따서 루게릭병으로 불린다. 박승일(45) 전 프로농구 울산 모비스 코치도 14년간 투병 중이다.

일본 ALS협회 부회장인 오카베는 10년 전 병을 얻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지만 감각과 지능은 정상이다. 미세하게 입 모양을 바꾸고 눈으로 신호를 보내며 세상과 소통한다. 입을 살짝 벌려 ‘아~’ 하면 옆에 있던 통역 도우미가 ‘가, 나, 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그가 눈을 깜빡이며 문장을 만드는 식이다. 이날 오시마 다다모리(大島理森) 중의원 의장에게 “장애가 있는 참고인에게 합리적인 배려를 검토하라”고 호소했다. 도우미의 입을 빌려 에둘러 말했지만 일본 국회를 향한 항의와 경고였다.

오카베는 당초 1주일 전 중의원 후생노동위원회에 출석할 예정이었다. 장애인 종합지원법 개정안을 심의 중인 의원들에게 통역 도우미의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하려고 준비했다. 제1야당 민진당이 참고인 출석을 요청했고 집권 자민당도 동의했다. 그는 “힘들지만 어떻게 소통하는지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고 일본 언론에 밝혔다. 그런데 갑자기 자민당이 새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정부가 제출한 아동복지법 개정안을 함께 심의하자고 요구했다. 민진당은 보육사 임금인상 법안이 먼저라며 맞섰다. 여야 힘겨루기 속에 일본 루게릭 환자 9900명을 대변하려던 오카베의 소망은 뒷전으로 밀렸다. 결국 그의 진술은 복잡한 통역 과정을 거치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이유로 거부됐다.

일본에선 지난달 장애인 차별 해소법이 시행됐다. 장애인에 대한 합리적인 배려를 의무화했다. 그런데 정작 법을 만든 국회는 모범을 보이기는커녕 문턱을 더 높였다. 일본 ALS협회는 “국회가 비장애인을 전제로 운영되고 있다. 장애인과 중증환자는 오지 말라는 것이냐”며 반발했다. 중의원과 참의원을 연결하는 지하통로는 의원들만 이용할 수 있다. 장애인들은 비를 맞으며 바깥통로를 오간다. 국회 본관의 식당도 의원 전용이다. 휠체어 탄 장애인 방청객들은 도시락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아 식사를 거르기 일쑤다.

반발이 커지자 참의원이 지난 23일 뒤늦게 참고인 진술을 허용했다. 오카베는 당찬 눈빛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사회 속엔 다양한 사람과 여러 장애가 있습니다. 장애가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함께 사는 하나의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병들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국회의 문턱을 낮출 것을 요구했다. 그의 소리 없는 외침은 개원을 앞둔 대한민국 제20대 국회도 귀담아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정헌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