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5)한지의 종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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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일본 굴지의 제지회사인 주자제지주식회사 조사과가 평찬한 『일본지업종면』(1938년)에는 희한하게도 그 당시 우리 한지의 거래 개황이 수록되어 있다. 그 자료는 한지의 종류와 용도를 다음과 갈이 소개하고 있다.
(백지) =서적·한약포장·창과 도배지·제지·장지문·장판 초배지용
(창지)=제책·창과 도배지·장지문·포장지용
(견양지) =창과 도배지·서적·포장·인쇄용
(후지)=장판의 유지·창문용
(장지) =제책용·창·장판용<온돌지> 온돌장판용
(공물지) =창·포장·족보·서책용
(대산지) =도배· 장지문·책자용
이상과 같이 8종으로 나누고있는데, 이 모든 종이들이 강인하고. 내구성이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적고 있다. 따라서 그 9할 이상이 창호지나 포장지·장판지로 이용되고 있으며, 예부터 필기용으로 쓰이던 공물지나 백지같은 것은 새로 나온 값싼 양지· 미농지에 그 자리를 빼앗기고 있다. 이 땅에서 한지가 양지에 의해 서서히 밀려나고 있는 과정을 엿볼 수가 있다.
1935변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상점은 전국에 모두 11개소 즉 경성에 두 군데, 대구에 한 군데, 경북 영덕에 7군데, 함북 회령에 한군데가 있었다. 제조 업자로는 경기도 고양·가평·양평에 각각 1명, 충북 청주에 2명과 제천· 단양에 각각 4명, 전북 전주에 2명, 그리고 일본인이 제조하는 태지전문업소가 전주에 있었으며, 그밖에 괴안·무주·남원에 각각 1개소, 그리고 순창에 3개소, 고창에 2개소가 있었다.
경북에는 영천에 2개소, 경산에1개소, 문경에 1개소가 있었다. 경남의령·함양·산청·합천에 각각 1개소, 평남 맹산에 1개소와 강동에 2개소가 있었고 홍경읍에는 2주에 1개소가 있었다.
이같은 한지제조업소의 분포로 미루어 보아 한가지 원료가 되는 재배지의 적지분포를 아울러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한지 제조의 호수는 전국 여러 산간지방에 8천9백40호가 있있으며, 그 총생산액은 3백81만6천6백원이었다고 한다.
당시 쌀 한가마에 6원이었으니 그때의 1차산업으로서는 그 규모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양기상에 대해 알아보자.
일제 서울에 진출한 일본인 양지상은 남대문로 3가 파출소 옆 한국은행이 쓰고 있는 건물의 일본지업, 대평로의 적야지업, 명동의 동양면화지업부 등 셋과 조선사람이 경영하는 업체로 선일 지물주식회사 하나가 더 있어 모두 넷이 있었다고 한다. 기물의 창설자는 상재와 담력으로 이름난 20대 초반의 박여직청년인데, 그가 일찌기 선 인쇄소를 운영하면서 종이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체험하였으며 인쇄업으로부터 지업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 후 약20년간 돈을 벌어 화신견업을 운영하는 기반을 닦았다. 지물을 경영하면서 그는 당시 조선에서 쓰여질 3년간의 신문용지 전량을 카나다로 한목에 계약함으로써 일본산 종이수입의 길을 죄고 그들과의 판매경쟁에서 완승했다는 에피소드를 남기면서 그때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이것은 2차대전이 일어나기 이전의 자유경쟁시대의 이야기다.
그 후 전쟁 말기에 이르면 일제는 통제경제하에 들어 가게 되고, 조선에서도 일본지업배급주식회사가 종이를 출판사·인쇄소·문방구업 등 그 실적에 따라 안배하여 배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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