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 여파···카페 휴지, 헬스장 운동복, 모텔 샴푸까지 훔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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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 비치해 놓은 빨대·휴지·각설탕 뭉텅이로 ‘슬쩍’

#서울 종로구에서 카페 ‘모리(Mori)’를 운영하는 장미연(48·여)씨는 매장 내 셀프바에 가급적 소량의 빨대와 휴지, 각설탕을 비치한 뒤 떨어질 때마다 채워 넣는다. 일부 손님들이 각종 물품들을 뭉텅이로 가져가는 일이 끊이지 않아서다. 장씨는 “얼마 전 한 할머니가 빨대 수십 개를 몰래 챙기는 걸 막아섰더니 어차피 손님들 쓰라고 주는 건데 뭐가 문제냐며 오히려 화를 내더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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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트니스센터에서 운동한 뒤 운동복·수건 훔쳐 가

#서울 역삼동에서 ‘디테일 피트니스센터’를 운영 중인 김상헌(37)씨는 지난해 10월 신규 회원 유치를 위해 남녀 운동복 각각 500벌을 새로 주문했다. 유명 스포츠 브랜드로 상·하의 한 벌당 3만5000원짜리였다. 하지만 운동복을 교체한 지 6개월 만에 남성 운동복은 90벌, 여성 운동복은 40벌가량이 없어졌다. 김씨는 “없어진 운동복만 450만원어치”라며 “회원들이 옷을 갈아입는 탈의실에 폐쇄회로TV(CCTV)를 설치할 수 없어 적발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카페 소모품 가져가도 절도죄 안돼
“장사도 안 되는데 경제적 부담 커”

모텔·음식점 물건은 엄연한 범죄
“경기 안 좋아지면서 갈수록 늘어”

손님에게 제공되는 소모품이나 매장 물건 등을 죄의식 없이 몰래 훔쳐가는 ‘틈새 절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수많은 자영업자들의 고민도 깊어가고 있다. 카페에서 사용하는 빨대·물티슈, 피트니스센터의 운동복, 음식점에서 사용하는 수저 등 식기가 대표적이다.

특히 카페 점주들은 손님들이 사용하라고 비치해 놓은 물품이라서 뭉텅이로 가져가도 제지하기가 쉽지 않다. 절도죄도 성립하지 않는다. 카페 모리 점주인 장씨는 “가뜩이나 경제난으로 장사도 안 되는데 소모품 절도가 끊이질 않아 이중고를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스타벅스를 비롯한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들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음료를 담아준 머그 컵을 가져가는 건 엄연한 범죄다. 틈새 절도가 적지 않아 ‘이 컵은 매장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는 경고 문구를 붙여놓았지만 별 효과가 없다고 한다. 국내 한 대형 커피전문점 본사 관계자는 “컵에 ‘훔쳐가면 처벌받는다’는 강력한 문구를 넣고 싶지만 위화감을 조성할까 우려돼 못하고 있다. 결국 손님들의 양심과 시민의식에 기대를 걸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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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텔에서는 샴푸·로션 몰래 챙기고, PC 부품 빼내기도

피트니스센터나 음식점, 모텔 등에서도 범죄에 해당하는 틈새 절도가 기승을 부리지만 대부분의 점주들은 예방책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모텔에선 헤어드라이어·샴푸·로션 등 생활용품이 자주 없어진다. 일부 모텔들은 틈새 절도를 막기 위해 모든 물품에 보안방지 태그까지 달아놨다. 하지만 미리 준비한 통에 샴푸나 로션의 내용물만 담아가는 일이 잦아졌다. 틈새 절도 행각도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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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새 절도는 음식점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특히 수저 등 식기가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서울 중구 서소문동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는 장민영(48)씨는 “영업을 마치고 식기 세척을 하다 보면 수저가 몇 세트씩 사라진 걸 발견하게 된다”며 “한 달에 수십 개는 없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틈새 절도의 대상은 대부분 저가의 생활용품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비싼 물건이 아니니까 괜찮겠지’라고 생각한다”며 “경기가 안 좋아질수록, 경제 수준이 낮은 국가일수록 틈새 절도 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추세”라고 분석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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