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4)한성도서 주식회사-제82화 출판의 길 40년(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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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성도서주식회사는 3·1운동의 부산물이었다.
일제가 문화정책을 내세우고 내보낸 조선 총독은 우리 나라 사람에게도 제한적이긴 하나 언론의 자유를 주겠다며 동아일보·조선일보 등 신문과 더불어 잡지와 도서를 출판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출판업에 뜻을둔 유지들이 모여 출판을 구상하거나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런 모임들 가운데에는 장도빈·이종준·이창익·한규상들의 모임이 있었다. 이 모임의 주동 인물은 장도빈으로 구한국시대에 신문기자로 명성을 날렸던 사람이다.
장도빈은 당시 황해도의 대지주였던 이창익·이종준과 그 친척인 한규상을 설득하여 출판사업에 자금을 대도록 했다. 출판을 통해 조국발전에 이바지해 보겠다는 장씨의 뜻이 성사를 본 것이다.
1920년 당시로 치면 적지 않은 규모인 30만원의 자본금에 불입자본 12만5천 원으로 「한성도서」가 설립되었다.
사장 자리에는 가장 큰 주주인 이창익의 부친 이봉하가 취임하고 전무 자리에는 이종준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중역으로 앉았다.
창설 당시의 한도 사옥은 서울 시내 청진동에 있는 한규상의 집이었다. 비록 좁기는 했으나 아담한 한옥의 사랑채였다. 당시로서는 현대식 건물을 세우는 일은 꿈같던 때인지라 한옥의 사랑채가 사무실로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이로부터 반 년 뒤 안국동 네거리에서 종로 쪽으로 내려오다가 오른 쪽인 견지동 32번지에 새 사옥을 신축하게 된다.
아담한 2층 건물로 아래층에는 판매부가 있어 자사 출판물은 물론 국내에서 발행되는 각종 도서·잡지를 도매도 하고 산매도 하였다.
당시 안국동 근처의 조선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높은 건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한도」는 그 위용을 과시하면서 문화의 광장 역할을 자부했던 것으로 나의 기억 속에 생생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한도는 『서울』이라는 종합지와 『신여성』이라는 부녀지, 그리고 『학생계』라는 학생 상대의 잡지 등 세 종류의 잡지를 계획하였다. 당시 18세라는 약관의 소년으로 『학생계』의 창간 편집장으로 발탁된 오천석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한도시절의 1년간은 실로 잊을 수 없이 유쾌하고 유익한 기간이었다. 청진동 시절은 사원의 수가 적어 한집안 식구들처럼 다정하게 지냈다. 중역들은 인격적으로 한결같이 훌륭한 분들이었고, 민족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해보려는 패기와 정열이 넘쳐흘렀다. 점심시간에는 중역도, 평사원도 다같이 설렁탕을 한자리에서 먹는 민주회사였다.
당시 『서울』의 편집 책임자는 장도빈이었고 『신여성』지는 김환이 주재했다. 『서울』 과 비슷한 성격의 잡지로는 천도교 계통에서 발행하는 『개벽』지가 있었다. 모두 인기 있는 잡지였다.
나는 그후 한도의 전무였었던 이선근으로부터 직접 들었는데 당시 한도는 문인들의 집합소였다는 것이다. 김안서와 노춘성은 사원이었고, 오상순과 염상섭 등은 이 곳의 출입객이었다. 따라서 한도는 잡지 이외에 문예물을 주로 출판하였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한도 가족 가운데서 훗날 오천석·이선근 등 두 사람의 문교부장관이 나온 일인데 당시 한도의 문화적 분위기로 보아 우연한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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