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1)-제82화 출판의 길 40년(4)-용지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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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해방을 맞았고 우리의 글과 말을 되찾았다지만 막상 우리 글을 제대로 구사하는 사람은드물었다. 한 민족의 문화적 공백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우후죽순처럼 출판에의 이상은 드높았으되, 출판의 원천적인 힘이 되는 저술은 공백상태여서 이제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저술이 없는 출판이란 배지도 않은 아기를 낳으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출판기획에서 첫 번째로 부닥치는 것이 원고의 발굴과 그 채택의 여부다.
그 시절에는 출판사로 들어온 원고의 열에 여덟은 문맥이 통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원고정리에애를 먹었고, 심지어 어떤 것은 아예 새로 써야만 했다.
나는 편집실무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고 출판자료를 구하거나 책을 판매하는 일등 운영에만 몰두했지만 편집자들이 애쓰는 모습을 늘 가까이서 보았기 때문에 그들의 숨은 남다른 고충을 알고 있다.
교정은 출판에 있어서는 생명과 갈이 중요한 것이다. 자기 출판사에서 발간된 책에서 오식이나 문맥이 통하지 않는 글 대목이 있어 독자로부터 지적을 받았을 때의 죄책감이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그 같은 출판인으로서의 보편적인 의식이 어느새 나의 몸에도 배게 되었다.
교정보기 어려운 것은 언제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해방직후의 활자는 그 높낮이가 들쭉날쭉인 데다가 종이마저 두께가 고르지 못하여 교정쇄를 낼 때 키가 큰 활자는 심히 눌려서구멍이 나도록 찍히고, 낮은 활자는 아예 보이지 않아 교정보는 고통도 여간 아니었다.
이 시절 시중에 나도는 종이 또한 가관이었다. 모든 물자가 귀한 판국이었으니 종이라고예외일 수 없었다. 해방직후의 4년 간을 회고하는 어느 기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해방 후 1년 간은 갱지기이고, 그 다음 l년 간은 선화지기, 그리고 그 뒤를 다시 갱지기가 이어진다.」
이런 시대구분은 나로서도 수긍이 간다. 첫 번째의 갱지기란 일제가 패망되자 그들이 얼마간 비축하고 있던 갱지가 마치 장물이 거래되듯 무질서하게나마 시장에 나돌던 시기다.이종이가 당시의 혼란한 정국에서 정치선전을 위한 각종 인쇄물·소책자 또는 사무용품으로유통·이용되었는데 반년도 못 가서 바닥나고 그때부터 출판계는 부득불 선화지를 쓰게 된다.당시 일간신문도 선화지로 찍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선화지란「굽지」라고 하는 설지를 양잿물로 용해하여 체로 친 다음 한장 한장 종이로밀려 떠낸 것이다. 당시 이런 방식으로 제조하는 선화지 공장은 여러 곳에 있었는데 그중대표적인 곳으로 군산제지공장과 서울의 마포형무소 등이 있었다.
선화지의 지질은 말할 수 없이 조잡했다. 지면이 고르지 못했고 구멍이 많이 뚫려 인쇄하는데 지장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궁하면 통한다는 말대로 때마침 멀리 마카오로부터 갱지가 들어온다는 소식이 출판계에전해진다. 빅 뉴스였다.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잡은 오징어와 물물교환으로 마카오산 갱지를 들여오는 것이었다. 선화지와 더불어 악전고투하던 출판계에 서광이 비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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