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톡] 이재무 시인 ‘속 보이는 글’이 가슴 울리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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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한 가지 일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어딘가 어리숙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사람들이 시인들이다. 물론 그들에게 ‘한 가지’는 시(詩)다. 시만 생각할 뿐 나이나 체면쯤 가볍게 여겨서인지 그들의 말과 행동은 파격적일 때가 많다.

부러움 반 걱정 반 그들의 파격을 경계하며 즐기다가 막상 그들이 몰두의 결과로 내놓은 한 줄기 서늘한 문장에 마음이 동할 때면, 그들을 ‘어리숙하게만’ 봤던 스스로가 머쓱해진다.

 지난 19일 저녁, 이를테면 그런 상황을 경험했다. 서울 인사동의 한 음식점, 이재무(58) 시인의 산문집 『집착으로부터의 도피』(천년의시작) 출간을 기념하는 자리. 주인공 이씨와 ‘5월시’ 동인 출신으로 한겨레 신문사 사장을 지낸 고광헌씨, 시인 박상률씨, 일간지 문학기자를 그만두고 시인·소설가로 활동하는 정철훈씨, 문학평론가 유성호·홍용희씨 등이 한자리에 모였다.

 다혈질이라 해서 한 때 ‘열혈청년’, 요즘은 5분만 마주하고 있으면 무슨 생각 하는지 모두 드러난다고 해서 ‘빙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이씨. 좌중을 휘어잡기 시작했다.

 “내가 그랬지, ‘선생님 언제 돌아가세요?’” 30년 넘게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는 23년 손위 선배 신경림 시인에게 자신의 산문집을 건네는 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선배 신씨가 세상을 뜰 경우 분명히 그 이름을 딴 문학상이 만들어질 텐데 생전 교유를 고려하면 그 상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올 것 같다는 농담을 건넨 것이다. 실은 건강하게 오래 사시라는 뜻의 반어법.

 그런데 신씨의 답이 더 걸작이었다. “내가 네 장례식에 가게 생겼다.” 자기 건강은 문제 없다는 얘기다.

 이씨의 만담 같은 얘기는 이어졌다. 그 중에는 30대 후반에 스무살 가까이 어린 여제자와 풋사랑을 나누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내에게 발각돼, 회개 차원에서 꼬박 2년 교회를 다녔다는 얘기도 있었다. 큰 사달이 날 줄 알았는데 아내가 차분하게 회 한 접시를 배달 주문한 후, 교회를 다녀야 한다고 강권했다고 한다.

 신경림 시인과의 얘기는 당연히 산문집에 실리지 않았다. 연애 사건은 실려 있다. 산문집에는 ‘빙어’ 같은 이씨가 계절의 순환, 자신의 가족사, 삶에 대한 단상 등을 솔직하게 털어 놓은 글들이 실려 있다. 매끈하지는 않아도 가슴을 건드리는 글들이다.

 제목 『집착으로부터의 도피』는 ‘집착과 울컥으로부터의 도피’라는 글에서 딴 것이다. 소유하려 집착하고 울컥 분통을 터뜨리는 바람에 살면서 지은 죄가 수북하다는 내용이다.

이씨는 “사는 일이란 하루하루 죄짓는 일에 불과하다는 것을 때늦게 천둥번개가 치듯 불쑥, 회한처럼 깨닫는다”고 썼다. ‘어리숙한’ 이씨에게 또 한 번 속았다. 그런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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